[소설]오래된 정원(284)

  • 입력 1999년 11월 29일 19시 13분


네가 이 고난의 바다 같은 세상에 이미 없다는 사실을 나는 훨씬 뒤에야 알았구나. 다시 새로운 겨울이었어. 직선제를 한다고 이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던 젊은이들도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섰던 시민들도 성난 얼굴로 백발을 휘날리던 사회인사들도 모두 이리 저리 찢어져서 제각기의 길을 갔다. 우리는 그때 모두 제 정신들이 아니었어. 취했던 걸까. 마치 아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것 같아. 신명나던 피는 혈관 속에서 차갑게 식어갔어.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거나 쓴 웃음을 지으며 증오도 없이 각자 흩어져서 제 갈길로 걸어갔어. 다시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선거 바람으로 차디찬 길 위에는 간밤의 서리에 젖은 선전 삐라와 인쇄물이 어지럽게 깔려 있었어. 우리가 도달한 게 겨우 고것 뿐이야.

나는 네가 따르던 송영태를 만났어. 그래 지난 이야기지만 말은 바로 해두어야겠어. 나는 사실 영태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하지만 친구로 그를 편안하게 생각해. 마치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들처럼 말야. 그리고 송이나 나나 당시에 외로웠어. 나이가 몇인데 그때까지도 아버지를 격렬하게 미워하고 있다니 순진하지 않니? 나는 녀석의 꼬임 때문에 그가 만드는 팸플릿의 필경사 노릇도 했고. 하지만 잘 보낸 시간이었어. 아이 아버지를 되돌아 본 계기가 되었으니까. 적당한 거리감이 생겼다고나 해야겠지.

송영태가 네 죽음에 관해서 얘기 해주었을 때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단다. 나는 그가 내 무릎에 더벅머리를 처박고 우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본 셈이야.그는 병원에서 많이 좋아졌대. 미경아, 표현할 시간도 없었던 너의 젊음을 생각한다. 네가 그에 관해 자랑스레 얘기할 때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얼굴로 따스함을 내보이던 게 생각난다.

나는 그곳에 가 봤어. 네가 신나를 뿌리고 불덩이가 되어 떨어졌다는 공장 정문 건너편 그 건물 옥상엘 올라가 봤어. 일 층은 부대찌개 전문 식당이고 이층은 다방이었고 그 위는 당구장이더라. 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 당구장 앞문을 슬쩍 지나서 가파른 시멘트 층계로 올라가 그 끝에 있는 작은 철문에 이르렀다. 녹슨 문을 밀어 보았더니 요술처럼 쪽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거야. 그래서는 한 발을 내딛자마자 삭막한 슬라브 지붕위에 서게 된거야. 빈 소주병들이 뒹굴어 다니고 오줌 지린 냄새도 났어. 나는 네가 섰던 자리에 정확하게 가서 발을 딛어 볼 수가 있었다. 공장 정문이 똑바로 보이는 바로 그 지점이겠지.노동자들이 길을 메우고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퇴근시간 무렵이었을 거야. 너는 무엇처럼 보였을까. 아마 꽃은 아니었을 걸. 차라리 네가 뿌린 유인물이 그렇게 보였겠지. 너는 타오르는 물체처럼 그냥 털푸덕, 떨어졌어.

내가 곁에 있었다면, 우린 다 같은 딸인데도, 내가 엄마가 되었을 것 같애. 내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 너의 그을린 머리카락은 푸실푸실 부서져 내리고 손가락은 타다 나은 삭정이 같았겠지만.

나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알미늄 샤시 창이 달린 식당에 앉아 부대찌개 시켜놓고 혼자서 소주를 마셨다. 겨울이라 금새 깊은 밤처럼 깜깜해지고 공장 앞에는 새파란 가로등이 켜졌어. 거기서 거뭇거뭇한 사람들의 자취가 나타나더니 길이 점점 가득차기 시작했지. 그런 조명에다 칙칙한 작업복 차림이라 그들은 어둠 속을 흘러가는 물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딘가에 도달하게 될까. 어디만큼 흘러가서.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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