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의근/'문화의 보릿고개'를 넘자

  • 입력 1999년 11월 29일 19시 13분


새 천년 새 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물리적 시간과 함께 문명사적 대전환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금세기에 우리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누대를 이어 온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난 일이다. 기성세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너나 할 것 없이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봄날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보릿고개의 서러움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토록 열심히 일했는지 모른다. 외국 사람들은 기적이라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눈물과 피와 땀이 만들어 낸 노력의 산물이었다.

새 천년의 문턱에서 또 넘어야 할 보릿고개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물질과 기술의 풍요에 가려진 ‘문화의 보릿고개’다. 정신문화 생활문화 역사문화의 빈곤이 우리 사회 곳곳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도 따지고 보면 문화적 허기가 불러온 총체적 부실의 모습이다. 최근의 대형 재난사고도 마찬가지다. 5000년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면서 민족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소홀히 한 감이 없지 않다. 퇴계 연구가 외국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국악이 외국인들에게 더 호평을 받고 있는 것도 그 한 단면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대륙과 해양의 다양한 문화를 우리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 낸 저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물질적 명리(名利)에 타락하지 않고 지조와 절의(節義)를 지켰던 선비정신 속에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정신문화의 진수(眞髓)가 응축돼 있다. 400여년전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 참전했던 사야가(沙也可·김충선 장군)는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고 조선의 인간애와 예의에 감동을 받아 귀화했다.

새 천년을 앞두고 이러한 문화 전통을 살리는 천년대계(千年大計)의 ‘새천년 문화살림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열린 마음으로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되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선비정신의 윤리와 도덕, 효제사상(孝悌思想)을 새천년에 걸맞은 정신윤리로 승화시켜 선진국(先進國)을 넘어‘선진국(善進國)’이 돼야 한다. 호학숭문(好學崇文)의 전통을 살려 지식기반사회를 앞당기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토대로 문화산업을 일으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가능성을 새롭게 살리는 ‘새천년 문화살림 운동’이다.

새 천년이 대립과 갈등을 넘어 평화와 인간중심의 사회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직장과 지방자치단체마다 자율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문화 역량을 배가해 나가자.

기본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생활문화를 바로 세우고 윤리와 도덕이 살아있는 정신문화를 꽃피워야 한다. 민족문화에 뿌리를 둔 주체적이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되 지구촌 시대에 어색하지 않은 글로벌 문화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 문화가 더 이상 사치스럽거나 비생산적인 투자가 아닌 고부가 산업이라는 인식도 가져야 한다.

새 천년에는 우리의 문화로 전 인류를 품안에 안는 ‘만남과 아우름’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새 천년 문화살림 운동’으로 문화의 보릿고개를 넘자.

이의근(경상북도 지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