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85)

  • 입력 1999년 11월 30일 19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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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나 한윤희에요.

이제 막 갈뫼로 돌아왔어요.

천 년쯤 흘러간 듯 해요.

돌아오자마자 내가 우리 집을 샀어요. 모양은 그대로인데 많이 쇠락했어요. 비료 푸대가 쌓였고 벽지와 장판지에는 곰팡이가 잔뜩 끼었답니다. 그래도 옛날얘기에 나오는 것처럼 쑥대만 무성하지는 않아요. 펌프는 벌겋게 녹이 슬었구요. 순천댁 사모님은 싹 허물고 조립식으로 간단하게 지어 버리라고 그랬지만 나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놓아둘 참이어요. 그래서 그냥 구들만 고치고 도배만 새로 했답니다.

이번엔 나 혼자 왔지만 다음 겨울 방학 땐 은결이두 데리구 올 작정이에요. 지금이 천구백 구십삼 년이라구 남들이 그러데요. 은결이는 열두 살이 되었어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된대요. 그앤 벌써 가슴이 나오고 여자 티가 나요. 당신을 많이 닮았더군요. 그앤 내 딸이지만 한편으론 내 딸이 아니기도 해요. 팔팔인지 쌍팔인지 올림픽 치르던 해에 은결이를 정희네로 입적 시켰어요. 은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었거든요. 이를테면 나는 아직도 미혼모였으니까요. 그앤 물론 나에게도 엄마라고 부르지만 즈이 이모에게 엄마라고 부를 때가 더 자연스런 모양이어요.

당시는 내가 참으로 견디기 힘들던 시절이었기도 해요. 왜 그랬냐구요? 고통스런 시간은 그 뒤에 더욱 많았는데도 돌이켜보면 그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당신이 돌아올 가망은 점점 멀어지고 내게는 모든 과거의 가치틀이 퇴색해버리고 있는 것 같았죠. 그림 따위를 무엇 때문에 붙들고 있는지 조용한 환멸이 가슴 밑바닥에 천천히 번져가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나 지금 막 돌아왔다구 했잖아요. 오 년 만이예요. 지금부터 여기 와서 다시 지난 다섯 해를 기록할 거예요. 나는 예전에 여기 버리고 갔던 스케치북에다 몇 자 적어 보았어요.

길은 언제나 돌아오기 위해서 있다 누구도 끝까지 걸어간 이는 없다 서 있던 자리에는 없어진 내가 있다 나는 이미 그다 나와 그가 이제 만난다 달라진 것은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길.

나는 여길 떠나고 싶어 했어요. 봄에 은결이를 정희네로 보내고는 더욱 그랬지요. 정희두 그맘때는 아들을 낳아서 벌써 세 살이 되었구요. 유학이나 가버릴 작정을 했지요. 나는 바깥에서 거기에 있던 나를 살펴보고 싶었는지두 몰라요. 뉴욕은 나에겐 맞지 않을 것 같았어요. 너무 복잡한 건 음식이든 옷이든 불편하지요. 파리는 나중에 확인했지만 자유가 축제처럼 펄럭이다가 일시에 젖어 떨어지는 만국기 같았어요. 나는 그냥 무덤덤하게 베를린으로 갔어요. 첩보영화에 많이 나오는 음울한 습기의 도시로.

나는 독일에 대해선 맥주와 빵 밖엔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처음엔 그냥 여행중이었는데 어쩐지 베를린이 마음에 들었어요. 거기 초겨울은 춥고 스산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안개가 무겁게 깔리거나 진눈깨비가 며칠씩 내려요. 엄청난 천둥 번개가 하늘을 찢곤 하지요. 오후 세 시쯤이면 벌써 캄캄해지고 여섯 시 쯤에는 거리엔 인적이 끊겨요. 나는 기차를 타고 서독에서 동독쪽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방면에는 조금 단련이 되어 있다는 나도 오랫동안 본능적으로 금지된 땅에 살아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데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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