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석/디지털혁명 소화못한 방송법

  • 입력 1999년 12월 2일 19시 47분


5년째 우리 사회에 소모적 여론분열을 불러 일으키며 표류하던 통합방송법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 문화관광위를 통과했다. 이 정도 수준의 법을 만들기 위해, 결국 이런 방법으로 통과되는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회적 노력을 기울이고, 그토록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가 하는 허탈감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방송환경 변화가 이만한 수준의 법이라도 당장 필요할 정도로 긴박하다는데 딜레마가 있다.

▼5년전 환경 반영 수준▼

김영삼 정부 초반에 급변하는 세계 방송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방송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 논의과정에서 관련 집단 간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치인들의 욕심까지 더해지면서 이제껏 시간만 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제정된 이번 통합방송법은 그로 인해 처음 두 가지 목적 중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형적인 법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송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방송관계법과 방송관련 정책부서들을 한 곳으로 묶어 정책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점은 매우 높이 살 만하다. 관계법의 통합과 정책부서의 일원화는 새로운 방송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새 방송법은 현재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고 되고 있는 디지털 기술혁명과 그것이 방송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을 전향적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의 교차소유 인정, 케이블방송의 복수사업자 허용, 위성방송 등의 뉴미디어 산업에 대한 관련 언론기업과 외국자본의 일부 지분 참가 허용 등 매우 진취적 내용도 담겨 있긴 하지만 미래의 변화를 앞서 맞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현상으로 이미 세계 곳곳에서 방송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루만 자고 나면 세계 도처에서 굵직한 미디어 기업과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업, 컴퓨터 기업들 간에 제휴합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아날로그 기술이 디지털 기술로 대치되는 지금 신문 방송 영화 음반 잡지 등으로 미디어를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모두 컨텐츠를 제공하는 정보제공자일 뿐이다.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멀티미디어가 중심적 미디어로 부각되면서, 이제 방송은 통신과 같은 텔레커뮤니케이션 산업은 물론이고 컴퓨터 산업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분야로 새롭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제정된 통합방송법은 새 방송법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되던 5년전 그때의 방송환경을 반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응하고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 방송 산업을 이끌어 가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정치권입김 요소 남아▼

새 방송법 제정의 두 번째 목적인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도 아직까지는 그 실현성에 많은 의문이 남는다. 신설 통합방송위원회가 행정권 준입법권 준사법권을 갖는 합의제 행정기구라는 점에서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독립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한발자국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곳곳에 정치권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남아 있다.

특히 여야가 마지막까지 난항을 거듭하며 합의에 실패한 방송위원회의 위원 구성 방식이 향후 위원회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집권여당은 방송위원의 선발기준을 전문성에 둘 것이기 때문에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방송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새 방송법의 원래 취지인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을 위해서는 방송위원회를 구성할 때 전문성을 중심으로 하되 정당간 의석비율도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고려돼야 할 것이다.

늦게나마 이루어진 이번 통합방송법안은 방송환경이 다매체 다채널 시대로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으며, 세계의 미디어 자본들과 힘겨운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 집착해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치권의 작태가 방송 부문에도 되풀이되지 않길 기대해 본다.

김영석(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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