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화여대의 이유 있는 시위

  • 입력 1999년 12월 2일 19시 47분


세계 어느 나라에 우리 대학가와 같은 곳이 또 있을까. 캠퍼스 내부는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지성과 학문의 공간이지만 대학 입구를 한걸음만 벗어나면 술집 여관 옷가게 등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업소들이 밀집해 있다. 이같은 주변 환경은 우리 대학문화를 왜곡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건강하고 생산적인 대학문화는 훌륭한 교수와 의욕적인 학생, 앞선 시설과 실험장비만으로는 이뤄지지 못한다. 선진국 대학가는 그 자체가 지성과 학문적 열정이 살아숨쉬는 또하나의 캠퍼스요, 문화거리다.

이러한 점에서 이화여대교수와 학생 1000여명이 엊그제 이 대학 앞에서 벌인 시위는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화여대 앞은 의류점을 중심으로 각종 상점과 술집들이 몰려 있는 거리다. 이화여대가 이번에 학교 차원에서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시위까지 벌이게 된 것은 이 지역에 재개발조합이 결성되어 23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을 짓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이화여대측은 초고층건물이 세워지면 향락업소 수가 더욱 늘어나 이 일대 교육환경 훼손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교 주변이 갈수록 소비와 향락의 거리로 바뀌는 것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들의 시위는 환락가에 ‘포위’돼버린 대학 구성원들이 물리적인 자구책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우리 대학 주변에 상가와 향락업소가 번성하는 것은 그만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학생들보다는 이른바 신세대들의 소비성향을 부추기는 상혼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화여대측은 이번 시위를 ‘교육환경 수호운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지역은 공원용지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오래 전에 각종 건물들로 무단 점유된 이곳을 이화여대측이 원래 계획대로 공원으로 조성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원용지로서의 환원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해당 주민들의 이해관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공공성을 지닌, 바로 인접한 교육기관의 호소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대학들은 유흥업소에 둘러싸여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대학 주변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 심지어 중고생까지 찾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환락가가 되고 있다. 그 책임 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이번 이화여대생들의 시위는 대학이 최소한 대학답게 존재하기 위한 ‘생존권 선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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