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영화 '해피엔드'/어느 실직자의 애정 집착…

  • 입력 1999년 12월 2일 19시 47분


바람난 아내와 정부, 실직자 남편이 벌이는 치정극. ‘해피 엔드’(감독 정지우)는 단순화하자면 신문 사회면 1단 기사정도의 통속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다.

그러나 제도와 도덕률로도 제어할 수 없는 들끓는 욕망 때문에 혼란에 빠진 인물들의 불안한 내면에 집중해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은행원이었던 남편 민기(최민식 분)는 실직과 아내의 불륜 때문에 고민하고, 어린이 영어학원 원장인 아내 보라(전도연)는 가정과 애인(주진모) 둘 다 버리지 못해 갈등한다.

카메라는 실직한 남편의 무기력한 일상을 담은 건조한 장면과 바람난 아내의 격렬한 외도 장면을 계속 오가며 현실과 욕망의 부조화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남녀의 성 역할이 뒤바뀐 것도 갈등을 극명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해피 엔드’는 단편영화계의 스타였던 정지우 감독의 대표작 ‘생강’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단편 ‘생강’에서 운동권 남편의 그늘에 있는 아내의 고단한 일상을 그린 정감독은 이번 장편 데뷔작 ‘해피 엔드’에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 아내가 불륜에 빠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봐야 하는 무능력한 남편의 비애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영화는 ‘배우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두 주연배우 전도연과 최민식의 연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민식은 콤플렉스가 가득한 실직자 남편의 침울함을 표정만으로도 잘 표현했다. 전도연은 톱스타로서는 보기 드물게 초반 4분 가량의 적나라한 정사 장면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대담한 연기를 했다.

그러나 내면의 갈등을 충실히 좇던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길을 잃어버린 듯하다. 착하고 소심한 남편은 아내에게 잔인한 보복을 감행하는 대목에서 느닷없이 노련한 살인청부업자처럼 돌변한다. 이 ‘튀는’ 장면 때문에 일관된 톤으로 유지돼 오던 현실성의 빛이 바랬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은 그가 어떻게 그 곳을 알아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등 중간과정의 생략도 너무 잦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남편이 거실에서 아무렇게나 잔 뒤 부시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는 마지막 장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든 그래도삶은계속돼야하겠지만, 그의 미래가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예감케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목 ‘해피 엔드’는 지독한 역설이다. 18세이상 관람가. 11일 개봉.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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