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新)예술이 들어온지 100년 남짓 됐다. 이 땅의 문화는 개척기의 참담한 시절도 있었고 한 때의 경제 성장이 안겨다 준 순간의 풍요도 맛 보았다.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나 시인 천상병의 삶은 고스란히 예술 그 자체를 살다 갔다고 할 것이다. 그뿐인가. 수 많은 선각자들이 척박한 토양에서나마 치열한 예술혼을 남겼다. 윤동주 최승희 이중섭 유치진 나운규 안익태 등 그들의 예술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예술 토양이 마련된 게 아니겠는가.
그런만큼 기행(奇行)과 훈훈한 에피소드와 낭만이 무성했던 그들의 작품은 근대 한국 예술의 굵은 획을 그어 주었다. 그들이 뿌린 예술의 씨가 자라 예술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대학이 만들어졌다. 가난했던 예술가에게 ‘대학 교수’라는 명예가 주어졌고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쟁이’로 폄훼됐던 장인들이 ‘교수’가 되면서 예술은 고급스러운 것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얻은 게 있다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는 이치일까. 보릿고개 시절을 막 넘긴 60년대 금의환향한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노 신동들의 화려한 데뷔는 우리 사회의 상류층을 자극하였던 것 같다. 급기야 골목마다 피아노 학원이 생겨났고 피아노 산업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예술대학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렸고 무대의 영광만 생각했지 그 이면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지난 시대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치열한 고통과 희생은 부모가 대신해 주었다. 이 때문에 왜 예술을 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맹목적이기까지 한 예술 지향이 확산되었다. 자기 뿌리가 없는 예술은 이내 시들고 마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교육행정 역시 적절한 수요 공급의 원칙이나 시대에 맞는 제도 개선, 예능교육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 학부형은 자신들 부부의 수입 가운데 80%를 모두 쏟아 부었다며 입시부정으로 인해 부서진 꿈에 심한 좌절의 모습을 보였다.
그간 필자는 현장의 평론가로서 20년 동안 2000회가 넘는 공연을 보아오면서 상당 부분이 허영이거나 과시로서의 예술임을 확인했다. 이제 ‘귀국 발표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어느새 나의 슬픔이 되어 버렸다. 한 젊은 예술학도가 거쳐야 했던 고통의 가시밭길 뒤에서 우리 사회가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 당사자는 물론 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이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과열된 예술 열풍은 재고돼야 한다. 대신 지금껏 투자된 예술을 가꾸고 결실을 맺도록 하고 소수 정예의, 이를테면 오래 전 예술 개척기의 선배들의 대를 이을 수 있는 ‘끼있는’ 이들을 키워내야 한다. 최근 예술대학의 갈등과 반목은 전체 흐름을 읽지 못한 자기 중심의 욕심일 수 있다고 본다. 예술가는 많은데 예술이 없는 우울한 세태다. 불현듯 그 옛날 골목길에 선명하게 울렸던 이름 모를 소녀의 피아노 소리가 그리운 것은 왜일까.
탁계석<음악평론가·21세기 문화광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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