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벽에다 아무 것도 걸지 않았지만 언젠가 카이저 빌헬름 교회 안에 있는 제삼세계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포스터 한 장을 문 옆에 붙여 놓았지요. 그건 아메리카 인디언 전사의 사진인데요, 포토 릴리프 처리를 했는지 아니면 낡은 사진을 거칠게 복제해서 그랬는지 목탄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지요. 무너져내린 단애 위에 서 있는 인디언 전사는 아랫편의 황야에다 뭔가 한 줌 집어서 뿌리고 있어요. 머리 위의 깃털이며 등에 멘 화살 꽂힌 전통과 한 손에 쥔 도끼 등으로 보아 그는 싸움에서 막 돌아온 전사가 분명했지요. 그가 씨앗이나 흙을 절벽 아래로 뿌리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건 아마 누군가의 화장한 뼛가루인지도 몰라요. 사진의 아래쪽에 검은 인쇄체로 독일어가 찍혀 있는데 ‘어머니 대지는 성스럽다!’ 라는 문장이었어요.
나는 베를린의 겨울이 좋았어요. 매섭게 추운 날도 있지만 대개는 스산한 비가 내리지요. 머플러를 목 주위로 칭칭 감고 우산이 거추장스러우면 모자를 하나 사서 쓰면 되요. 여름 비처럼 소리나게 쏟아지는 그런 비가 아니라 그냥 하염없이 연이어 내려요. 그리고는 불 켜진 가로등 주위까지 부옇게 되도록 안개가 껴요. 스산한 한기가 목덜미와 소매 끝으로 해서 팔뚝까지 스며들 정도랍니다. 나는 자루를 메고 광장 건너편에 있는 세탁장으로 빨래를 하러 가곤 했는데 거기서 친구를 사귀게 되었어요. 동전 몇 개면 세제를 타내고 세탁과 건조와 다림질까지 한 코스로 할 수 있는 곳인데 음악두 나오구요 한쪽에는 잡지나 책들이 꽂혀 있고 음료와 커피 자판기도 있어서 빨래하는 동안 앉아 있기가 지루하진 않아요. 빨래를 돌리면서 앉아 있었는데 다 저녁 때라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글:황석영>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