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문화 우리건축/부엌]주부 유배지? 모임터?

  • 입력 1999년 12월 5일 18시 58분


‘아줌마’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은 쉽게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부엌은 바꿀 수 있다. 부엌을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도 바꿀 수 없다.

부엌은 달라졌다. 난방의 기능이 사라졌다. 식사의 공간은 부엌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섰다. 아무리 전통적인 한옥이어도 부엌이 입식으로 바뀌어있지 않으면 더 이상 주택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1년에 제사가 열두 번인 집안의 장남에게 시집가겠다는 아가씨는 있어도 아궁이에 군불 때는 부엌에서 살림을 하겠다는 아가씨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부엌은 주택에서 유일한 노동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근대화 이전에 집터는 일터와 다르지 않았다. 논과 밭에서 하지 못한 작업은 모두 집에서 이루어졌다.

직장과 주택이 분리되면서 노동은 주택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부엌은 주부의 노동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소외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저녁에 식구들이 모여 사과 하나 깎아 먹을 시간도 빠듯한 것이 우리의 일상. 그러나 대화의 부재에 대한 비난은 주거공간에도 쏟아져야 한다. 남향은 거실과 안방의 몫인 것이 우리 주거의 일상적인 형태. 부엌은 나머지 그늘진 곳에 자리잡는다. 게다가 그 부엌은 주부에게 벽을 보고 서라고 한다. 퇴근한 남편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주부는 남편을 등지고 상을 차리라고 한다. 온 식구들이 모여드는 명절에도 주부는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벽만 보며 설거지를 하라고 한다.

부엌은 주택의 조종석이다. 부엌에서 작업하는 주부는 거실에 앉은 남편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식탁에 앉아 숙제를 하는 아들 딸의 말벗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멍하니 텔레비전 보는 남편을 개수대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부엌은 주부가 외부에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 왔다. 말끔하지 않은 부엌살림이 여기저기 늘어선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한참 작업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감시 당하듯이 노출시키고 싶은 사람도 없다.

문제는 잘못된 건축 설계에 있다. 1년에 몇 번 쓰지도 않는 온갖 잡동사니가 굳이 부엌의 수납공간을 차지할 필요는 없다. 다용도실에 별도의 수납공간을 만들고 이들을 저장하면 부엌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깔끔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 최소화된 부엌은 정돈하기도 쉽고 누구의 앞에서도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 땅에서 다용도실은 빨래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 한가운데는 세탁기가 자리잡았다. 그 옆에는 수도꼭지가 매달렸다. 문제는 그 높이다. 다용도실 수도꼭지는 무릎 높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탁기 높이의 수도꼭지에 호스를 바닥쪽으로 연결해놓았다. 21세기의 주부들에게 아궁이에 군불 지피던 할머니들처럼 쪼그리고 앉아 걸레를 빨라고 한다. 그러나 걸레도 서서 빨 수 있어야 한다.

다용도실은 또한 세수 대야에 물을 받아 작업을 하다보니 바닥에는 타일이 붙었다. 그 찬 바닥에 들어서자니 문턱에는 슬리퍼도 한 켤레 놓여 있어야 한다. 결국 다용도실은 빨래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단일용도실이 되었다.

다용도실이 부엌의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지 않고도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의 보조 수납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용도실은 커지고 부엌은 작아져야 한다. 그래야 부엌이 청소하기도 정리하기도 간단해진다. 그만큼 깨끗해진 부엌은 그제서야 주택의 주인공으로 떳떳이 나설 수 있다.

우리 주거문화는 이제 완전히 아파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파트는 입지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좋은 위치에 지으면 대강 지어도 팔린다는 아파트 시장의 논리는 우리에게 그만큼 문화로서의 주거를 이야기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안방의 커튼을 바꾸는 것이 주거문화의 내용이 아니다. 거실과 부엌사이에 아치 장식을 해놓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장을 바꾸는 것은 소비자들이다. 미분양은 아파트 건설회사의 존립을 위협하는 치명타다. 그렇기에 아파트 건설회사로서는 견본주택(모델하우스)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 견본주택에 가서 주부들이 이것 저것을 꼬집어야 아파트가 바뀐다.

인터폰이 울리면 설거지를 하다말고 거실로 뛰어나가야 하는 설계가 합리적이냐고 물어야 한다. 냄새 빨아 들이는 후드자리가 이렇게 구석에 있으면 주부는 항상 벽만 보게 되지 않느냐고 불평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오랜 시간 집안에 머무는 주부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 잠만 자는 안방 대신 남쪽에 갈 수는 없느냐고 물어야 한다. 전기밥솥, 전자렌지, 토스터, 믹서, 주서, 커피포트가 늘어서는 것이 현대의 부엌인데 플러그 꽂을 자리는 왜 하나밖에 없느냐고 따져야 한다. 고속 통신망을 깔아놓았다고 광고하면서도 수많은 컴퓨터 주변기기의 플러그 꽂을 자리는 한 곳밖에 없어 전파상에 연결선 사러 가게 만드는 것이 첨단 아파트냐고 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공간이 바뀐다. 주거문화가 바뀐다. 아줌마가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서현

▼가전제품-주방가구 기능만큼 디자인 중요성 높아져▼

제2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세계를 바꾸었다. 각국의 국경을 바꾼 것 뿐 아니라 사회구성을 바꿔 놓았다. 희미하게라도 존재하던 수직적 신분의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하녀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된 것은 가장 확실한 사건이었다.

세계대전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은 여자들이 가사만 돌보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전쟁에 나간 남자들 대신 여자들은 공장의 주된 노동력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미국이 그 선두주자였다. 하녀가 사라진 후 그 노동력은 전기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전기청소기, 전기세탁기, 전기오븐 등이 속속 등장하게 된 것이다.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하녀가 하던 허드렛일을 중산층의 가정주부가 거부감 없이 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 역할을 디자인이 맡았다. 하녀들이 사용하던 부엌기구들은 철저히 기능적인 모습이었다. 굳이 아름다워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가전제품의 디자이너들은 중산층 주부들의 품위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맵시있는 디자인들을 속속 선보였다. 가전제품의 제작회사들은 이런 제품들이 가정주부에게 얼마나 안락한 여가시간을 갖게 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광고했다.

전략은 주효했다. 가정주부들이 기꺼이 전기청소기들 밀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가전제품은 주부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이 전략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름답게 디자인된 가전제품의 구매로 가정주부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광고전략은 오늘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엌가구 광고에서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기능을 넘어 품위와 격조를 강조하는 광고는 아직도 꾸준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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