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이윤기/학연-지연 '연줄사슬' 이젠 끊자

  • 입력 1999년 12월 5일 19시 56분


부끄럽지만 고백하고 말겠다. 시인이기도 한 김교수는 10년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다른 한 시인의 고향 전라도 땅에다 시비 세워주는 일을 맡고 있다. 김교수는 세상 떠난 시인의 지방 명문 고등학교 선배다. 김교수는 시비를 세워주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액수가 모자랐다. 김교수는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나에게 “그 좋은 머리 좀 빌리자”고 했다. 나는 ‘좋은 머리’라는 말에 우쭐해진 나머지 쾌도난마하는 기분으로 그에게 권했다. 당신네 고교 선후배 중에는 글쓰는 일과 무관하지 않은 장차관 국회의원 언론사 사장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세우는 것이 세상 떠난 시인의 시비이고, 그 일을 맡은 자신이 시인인만큼 시인답게 그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시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뿔싸!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늘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연줄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는 인간이었구나! 나는 신문의 인사 및 동정란을 안 보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챙겨 보아온 인간이었구나. 아는 사람이 높은 자리, 좋은 자리로 찾아 들어가면 내 일처럼 은근히 좋아하던 인간이었구나! 안 그러는 척하면서, 누가 어떤 자리를 찾아들어갔는지 은밀하게 기억해 두려고 한 인간이었구나! 얼마나 부끄럽던지, 나는 그에게 머리통이 똥통인 것을 고개숙여 사죄했다.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사귄 내 선배 중 한 분은 지금 매우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 그는 내가 몇달씩 서울에 머물면서도 자기에게 전화 한번 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굉장히 섭섭해 한다.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의리없다고 나를 꾸짖는다.

그러면 나는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그는 그 높은 자리에 꽤 오래 앉아 있다. 그는 밖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직접 받지 않는다. 부속실에서 전화를 건 사람에게 “메모를 남겨주세요”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메모만 그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는 그 메모를 보고 답전여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의리가 없어서가 아니고 청탁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도 썩 괜찮은 구석이 있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한 시인의 시비 세우는 일에 어찌 그렇게 한심한 아이디어밖에는 보태지 못했을까? 높은 분들 몇몇은, 시인 김교수 덕분에 돈과 시간을 빼앗기지 않은 줄 아시라.

고향 갔다가 가까운 친구들과 대판 싸우고 올라왔다. 내 친구의 소개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 친구는 쉰살이 넘은 다른 친구를 소개하면서 아무 대학을 나와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아무 소주회사 회장의 사위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발끈한 것이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그 회장 사위에게도 골을 냈다. 당신은 속도 없어? 30년 전에 나온 대학이 아직도 당신에게 유효해? 처가까지 들먹이는데 왜 가만히 있어? 나는 김교수 덕분에 키 한뼘 더 자란 것을 스스로 기특해 하면서 친구들을 난타하고 돌아왔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긴 약력은 동류항목을 가진 자들에게 구애하는 더러운 수작이라고 할 수 없을까? 연줄은 ‘인정’이라는 미풍양속의 시체에 슨 구더기다. 원래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기도 같은 것은 더욱 하지 않기로 한다. 내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문밖에서 흐느끼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일 터이므로.

이윤기(소설가)

*다음회 필자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최해실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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