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유미리의 미혼모 선언(?)

  • 입력 1999년 12월 7일 19시 48분


‘옛날의 소설은 현실에 독(毒)을 타서 써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에 물을 타야 소설이 된다. 왜냐하면 마주한 현실이 너무 지독하므로.’ 고 이병주(작가)의 글 가운데 이 비슷한 대목을 기억한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가 화제가 될 때마다 이병주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참으로 소설보다 처절하고 지독한 삶을 견뎌온 젊은 여자, ‘인생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작가’일 수밖에 없는 유미리를 생각할수록.

▽일본 도회의 보잘것없고 빈한한 한국 핏줄의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빠찡꼬에 빠져 있고 가출한 어머니는 다른 남자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학교에선 놀림과 따돌림만이 기다린다. 초등학교 졸업식날 가련한 동생들과 ‘자살놀이’나 하자고 제안하는 소녀였다. 현실은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여중 1년생은 위스키를 마시고 낭떠러지에 서서 겨울바다를 향해 투신자살을 기도한다. 그 일로 학교 중퇴가 결정된 날 학우들로부터 생애 첫 꽃다발을 받게 된다.

▽유미리는 ‘과거’를 감추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까발리는 것이 “불행했던 과거를 치유하는 방식”이라고 우긴다. 현실과 영원히 어울릴 수 없다는 위화감(違和感)이 소설을 쓰는 동기이자 그녀의 무기란다. 언젠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소설)은 나를 상처입혀 피흘리게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한 방송기자와의 연애로 사생아를 배고 낳기로 하게 된 과정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아이를 뗄 것인가 고민과 주저도 많았다. 여느 연속극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남자의 이혼을 기다리고, 오지 않는 남자를 잊기로 다짐하는가 하면, 끝내는 다시 전화 걸어 만나달라고 애소하는 초라한 자신을 털어놓는다. 결국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전에 그녀와 동거했던 한 연출가의 암투병을 지켜보며 그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원하면서 뱃속의 ‘생명’을 지울 수 없다는 결론이었단다. 지독한 현실 위를 유랑해온 유미리 스타일의 청춘고백이 문학처럼 아릿하다.

〈김충식 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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