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92)

  • 입력 1999년 12월 8일 17시 57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옆의 입구에서부터 벽을 따라 돌아가면서 빈틈없이 붙어 있는 그림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부인은 그대로 소파에 앉아서 말했어요.

사실 그이는 이십 년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그림을 보다가 그네에게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이는 오십 연대에서 육십 연대 중반까지 팔 년쯤 열심히 그리다가 병원으로 갔으니까.

내가 본 것은 미리 정해진 관념이나 객관적 세계의 이성으로부터 놓여나겠다던 추상 표현주의적인 물감의 흔적이었어요. 나이프와 거친 페인트 붓의 자국이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그어져 있거나 어린이의 낙서처럼 뭉개져 있기도 했습니다. 내가 대학의 졸업전에서 흔히 보았던 낯익은 화면들이었지요. 그리고 벽의 두 번째 면에는 물감이 처음 보다는 두텁고 젖은 것처럼 번져 있는 부분들이 서로 겹치거나 나뉘거나 만나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 세 번째 벽 면의 중간까지는 이른바 문자 추상이 단순한 바탕 위에 거친 터치로 그어져 있는 것들이었구요. 벽의 맨 끝에 이 방에서 가장 큰 그림 한 장으로 마감되어 있더군요. 그건 번진 물감의 형태를 손가락으로 무수한 원과 직선을 그으며 뭉갠 것이었어요. 빛과 색은 강렬하지도 않고 중간 톤인데 물감을 쓸줄 모르는 초보자가 이 색 저 색을 덧칠하다가 원래의 색깔이 차츰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리는 사람의 생각이며 구성이며 기획을 처음부터 배제 하려던 노력 끝에 정반대로 그는 자신의 손가락의 흔적을 무수하게 화폭 안에 남기고 있어요.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술잔을 든채로 조금씩 마시면서 한참이나 그림 앞에 서 있었지요.

그것이 제일 좋지요?

라고 클라인 부인이 말했어요. 나는 오히려 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를 마리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예 그러죠.

그는 자기 재능을 진지하게 낭비했어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벽돌더미와 쥐 밖엔 남은 게 없었지요. 우리는 둘 다 이 나라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했죠.

전쟁 때에는 뭘했는데요?

히틀러 유겐트. 알아요? 지금도 독일인은 누구나 병정이거든. 질서있게 줄을 잘 맞추지요.

그럼 여길 떠나지 그랬어요.

가난해서 그냥 살았지.

나는 마리 할머니와 한 시간쯤 더 이야기 하다가 술을 두 잔 더 얻어 마시고나서 일어섰어요.

잠깐 내 방에 가실래요?

그래도 괜찮아요?

도자기 값을 받아야죠.

그네는 서너발짝 거리의 마즌편 내 방에 가려는데도 어깨에 붉은 털실 숄을 걸치는 거예요. 나는 마리를 등 뒤에 달고 내 방으로 들어섰어요. 내 뒤에 그네의 눈을 달고 들어선다는 느낌이 들자 내 방이 갑자기 낯설어지더군요. 마리는 먼저 문 옆에 붙여진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그 아래 인쇄된 말을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어머니, 대지는, 성스럽다.

이건 그럴듯한 사진이군요. 하지만 유럽은 아주 오래 전에 어머니를 죽여 버렸어.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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