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요. 우린 이미 이런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아, 그건 내 것이 아니예요. 지난번 이 방 주인이 남겨두고 간 거예요.
쾰른에 가서 이 그림을 본적이 있어요?
아직….
하고나서 나는 마리에게 말했어요.
한쪽에선 사람이 지겨워져서 쫓아내고 달아나고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요.
마리는 그냥 알콜 중독에 걸린 할머니는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그네는 희미하게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군요. 슈테판은 국립 요양원에서 죽었어요.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십 년이나 거기서 살았어요.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마리에게 내밀었습니다.
자요, 삼백 마르크요.
그네가 돈을 받더니 진짜인가 확인하려는 구멍가게 노파처럼 눈 앞에 대고 한 장씩 헤어 보고나서 상의 주머니에 찔러 넣더군요. 마리를 문 밖으로 배웅하고서 나는 그네가 남기고 간 초라한 중국 호리병을 식탁에 올려둔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아마 저 텅빈 주둥이에다 흑장미라도 두어 송이 꽂아 두고 밥을 먹어야겠다고 잠깐 생각해 보면서.
마리와 슈테판은 전쟁의 페허 속에서 어떤 화실이나 아트 전문 슐레의 교실이나 아니면 허름한 창고 전시실에서 만났는지 알 수 없어요. 그들은 동독에서 넘어 오거나 동독으로 넘어갈 젊은이들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환멸에 가득찬 전후의 서독에서 적응하기에는 힘겨웠을 겁니다. 나중에 동독의 많은 예술가들이 선전의 매너리즘에 빠졌다가 스스로 애매 모호해지고 드디어는 환멸 속에서 진저리를 치며 일어선 것처럼요. 제삼 제국의 기호였던 크로이츠 하겐의 날카로운 이빨에서 벗어나자마자 젊은 슈테판은 미국의 야만적인 자유의 천진함에 매료 되었는지도 모르죠. 모든 편향은 반동에서 시작되니까. 그러다가 저 마리에게 선물로 사온 이국적인 병의 옆구리에 그려진 봄날의 낮잠 같은 곳으로 갔다가 차츰 베를린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오려는 때에 출구를 잃어버리고 말아요.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걸까. 마리 할머니처럼 이십 년 전에 머문채로 스스로 마취되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네의 말에 의하면 나중에 기성세대가 된 슈테판의 친구들이 그의 작품을 사주기도 하고 공공 미술관에 소개하기도 해서 조금씩 알려졌답니다. 하지만 나는 그네의 방 안에 세 개의 벽면에 걸려있는 초라한 몇 점의 유작들을 보면서 한 개인이 지녔던 이상이라든지 일이라든지 생애 따위가 얼마나 작은 거품에 지나지 않는가를 느낍니다. 나중에 다시 마리의 방에 가면 마지막 손의 흔적을 볼테지만 그게 그의 시작이었을 거예요.
내가 마리 클라인 부인의 이야기를 상세히 적는 이유는 그네가 그 시절에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어요. 또한 내가 겪게 된 뼈저린 사랑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참, 내가 빼먹은 게 한가지 있어요.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사회적인 결혼 절차를 통과하지 않고 자유롭게 동거했어요. 지금은 터키인 거주지처럼 되어버린 크로이츠베르그의 창고에서 십년을 살았다지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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