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을 맞은 미국의 서점가에서는 20세기가 ‘위대한’ 미국의 시대였다는 입장에서 씌어진 회고록이나 오만한 역사서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책들 사이에 ‘미국남자’의 몰락을 보고하는 책이 지난달부터 지식인사회의 화제다.
미국판 고개숙인 남자라고나 할까. ‘당했다’라는 표제가 묘하다(원제 ‘Stiffed’는 팁이나 호의를 거절당했다는 뜻으로 쓰이는 속어다). 부제는 ‘미국남자들의 배신’.
제목과 부제가 합쳐지면 복합적인 말이 된다. 미국남자들이 기대를 배신하고 남성다움을 잃어버렸다는 뜻도 되고, 사회가 그 남성다움에 대해 응분의 보답을 하지 않아서 미국남자들이 배신당했다는 뜻도 된다. 이분법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적인 말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는 여기자. 92년에 낸 첫 책 ‘반동:미국여자들에 대한 선포되지 않은 전쟁’에서 여권 신장을 두려워한 미국의 남성들이 전문직에 진출한 30대의 독립적 여성들이 모종의 인격적 결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철저한 자료 제시를 통해 고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언론들이 80년대에 레이건의 보수주의에 장단을 맞춰 얼마나 여성운동을 조직적으로 경멸하고 왜곡했는지를 철저히 추적한 그 책은 지금도 남녀문제의 토론에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이번 책은 전작과는 사뭇 다르다. 실베스타 스탤론, 포르노스타, 실직자 등 각계각층의 ‘미국남자’를 수년간 인터뷰해 정리한 이 책에서 적극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저자는 미국이 ‘남자다움’을 잃어가고 있다며 탄식해 뭇사람들을 놀래게하고 있다.
‘미국 남자’란 무엇인가.팔루디의 대답은 표지에 사용된 공사현장 사진이 말해 준다. ‘몸으로 일하는 남자’가 그것이다. 미국남자들은 전통적으로 팀을 이루거나 공동체에 참여해 그 공동체가 공유하는 덕목이나 인격모델에 의지하면서 세상의 주인이 되어가도록 키워진다.
그런데, 팔루디에 의하면 2차대전 후부터 남자들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신념을 잃어버렸다는 것. 베트남 전쟁은 ‘미국남자’의 씩씩함이 배반당한 대표적 경우. 전쟁에서 돌아와도 전쟁영웅 대접은 없었고 거꾸로 양민학살자가 된 자신을 발견한 ‘미국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공동체가 교육시키고 기대하는 가치를 실현해가는 세상의 ‘주인’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남성성 붕괴’의 주범으로 팔루디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상품소비문화를 든다. 몸으로 일하는 건실한 제조업은 점차 사라지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지금, 패션 속옷을 입도록 꼬드기는 소비문화는 전통적인 ‘남성다움’을 야만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 주인이 아니라 ‘당하는’ 역할로 남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 미국 페미니스트는 이제 여자의 권리만 외치는 단계를 넘어 남자의 몰락도 같이 걱정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영준<하버드대 동아시아과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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