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좋지 않은 옐친대통령이 이번 베이징(北京)방문을 강행한 것은 체첸사태에 대한 미국의 최근 개입 움직임을 중국과 함께 견제하겠다는 눈앞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의 ‘독주’와 패권주의를 더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더 큰 전략적 목적이 있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날 양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을 봐도 이같은 공동목적은 분명히 드러난다. 공동성명은 “유엔헌장과 국제법의 기초위에서 다극화 세계를 구축하고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주도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며 유엔헌장의 정신과 원칙을 왜곡하고 타국에 무력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인도주의적인 간섭’ 등을 명분으로 국가주권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오늘날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분명히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그러나 중―러관계가 당장 반미 군사동맹이나 철저한 ‘반미전선’으로 발전할 것 같지는 않다. 두 나라가 다같이 미국의 ‘신간섭주의’와 독주체제에는 반대하고 있으나 개별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미국과 등을 돌릴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러가 공동전선을 형성하려는 속셈은 중―미(中―美), 러―미 개별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어떻든 한반도 주변 4강의 움직임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큰 변수가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4강이 편을 가르거나 갈등상태로 접어들 경우 그 파장은 바로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에 직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그같은 역사를 생생히 경험한 바 있다. 다시는 4강의 대립이나 갈등이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요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부가 그동안 4강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외교적 위치가 확고히 자리잡힌 것은 아니다. 우리와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했는데도 대미(對美)일변도 외교는 여전하다. 4강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우리의 국익에 결부시키려면 편향된 외교로는 안된다. 중―러의 움직임도 그런 차원에서 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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