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미스터]인텔리전트빌딩 "첨단이 되레 불편해요"

  • 입력 1999년 12월 12일 19시 47분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자리잡은 제일제당㈜에서 일하는 양모씨(26).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바짝 긴장해야 한다.사무실층(5∼15층)의 버튼을 누르려면 먼저 센서에 ID카드를 대야 하기 때문.

그러나 이 ‘멍청한’ 센서는 한 번에 한 층만 인식한다.다른 카드를 읽으려면 몇 초씩 간격을 두어야 한다.엘리베이터가 직원들로 가득차는 점심시간엔 자칫 16층 식당에서 사무실이 있는 12층에 내리지 못하고 1층까지 떠밀려가기 일쑤.

“인텔리전트 빌딩이면 뭐해.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걸….”

▼문명 속의 비(非)문명▼

‘인텔리전트 빌딩’.인간의 뇌가 체온을 조절하듯 건물의 인공지능(컴퓨터)이 몸(빌딩)의 최적 온도와 습도까지 알아서 조절하는 건물이다.정보통신망은 물론 사무자동화 기능을 갖춰 효율적이고 편리한 ‘21세기 지식사회 토대’로도 불린다.

실제 정보통신부가 초고속정보통신 인증제도를 실시한 올 7월 이후 인텔리전트빌딩 인증신청은 8월 90건에서 11월 253건으로 급격한 증가세(그래프 참조).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사회학자 조리 리처가 저서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지적한 것처럼 ‘합리성의 비합리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빨리 먹기 위해 간 패스트푸드점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듯,모든 것이 ‘인텔리전트’하게 갖춰진 빌딩에서 정작 인간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효율성속의 비효율성’‘편리함 속의 불편’‘문명 속의 비문명’을 감수하면서….

▼누굴 위한 효율?▼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O사.밤8시 건물 전체가 소등되기 전 미리 전화로 “이 방은 끄지 말아달라”고 신청해야 한다.컨설턴트인 김모씨(36)는 “야근이 잦아 거의 매일 전화를 해야 하는데 퇴근 시간엔 통화폭주로 몇 분씩 전화기를 잡고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강남타워로 최근 사무실을 옮긴 이모씨(39·LG텔레콤).엄격한 보안관리를 위해 비상계단쪽 출입문은 나갈 수는 있지만 들어올 수는 없는 ‘원웨이록’으로 돼있다.그는 한층쯤 걸어가려고 비상계단으로 나갔다가 근무층(21층)에서 1층 로비까지 하염없이 걸어야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포스코빌딩에 사무실을 둔 광고대행사 코래드는 ID카드가 있어야만 문을 열도록 돼있었다.그러나 “불편하다”는 직원들의 항의에 일주일 만에 항복.문을 아예 열어놓고 대신 경비원을 앉혀놨다.

대한전기학회 인텔리전트빌딩시스템(IBS)전문위원회 임상채위원은 “이는 빌딩의 ‘인텔리전스’에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이 미치지 못해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중앙통제적인 최적의 효율성은 개개인의 요구를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효율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사람이 시스템에 맞춰간다▼

모든 게 컴퓨터와 네트워크 중심인 삼성SDS(서울 강남구 역삼동).진작부터 출입문에 ID카드를 열어야 들어나고 나갈 수 있었지만 올초부터는 컴퓨터에도 ID카드를 넣어야만 작동되도록 해놓았다.

이 회사의 이모씨(29)는 “부원이라야 16명밖에 안되는데 부회 공고도 사내정보통신망으로 한다”고 말한다.같은 것을 몇번씩 확인하는 등 강박적 사고를 하게되고,여가시간이 생기면 동료들과 어울리기 보다 인터넷쇼핑이나 사이버주식거래를 하는 등 인간관계도 갈수록 파편화하는 것 같다는 얘기.

“인간이 시스템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서 언젠가는 그 시스템이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할 지도 모른다”라는 조지 리처의 예견이 인텔리전트빌딩 안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사이버 첨단아파트 투자가치는 미지수▼

업무용 빌딩의 최첨단이 인텔리전트 빌딩이라면 아파트의 첨단 경향은 ‘사이버 아파트’.초고속정보통신망을 갖춰 가정에서도 인터넷TV 전자상거래 홈뱅킹 화상전화 등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아파트를 말한다.

올 4월 입주가 시작된 서울 성동구 옥수동 삼성아파트 등 사이버아파트의 투자가치는 얼마나 될까.

부동산중개업체 반도컨설팅의 문제능부장은 “옥수동 삼성아파트(싸이버)의 시가는 2억9000만∼3억2000만원”이라며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2년 전 입주한 옥수하이츠의 같은 평수가 2억4000만∼3억원인데 비하면 최고 5000만원의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이 중개업체에 따르면 최근 분양된 32평형 삼성아파트는 2억500만원(30% 옵션제외).삼성건설 영업담당 J과장은 “타 브랜드보다 약 1000만원 더 비싼 가격인데 이 가운데 사이버화로 소비자가 추가부담한 비용은 500만원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만한 비용에 대한 소비자의 만족은 어느 정도?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인터넷 처리 속도가 빨라 입주자들이 좋아한다”고 전하지만 일부에선 인터넷TV나 화상전화 등 ‘사이버 라이프’가 현실화되지 않아 아직은 ‘그림의 떡’이라고 평가.

부동산 전문잡지 ‘부동산 뱅크’의 김우희편집장은 “아직까지 사이버아파트의 투자가치나 기능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초고속통신망은 전화선처럼 곧 생활의 일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이버아파트라고 해서 투자가치가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신중하게 분석했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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