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여덟번째 ‘성 표현 억압 위선의 굴레를 벗자’는 마광수 교수의 오랜 믿음이 적절하게 정리된 것이지만 사회 일반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문명이나 문화라고 부르는 것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위선적 구조와 그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에 대해 조금이라도 유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논지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위선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이 하필 성 표현뿐이겠는가. 폭력과 잔혹 취향, 물신숭배 등 엄연한 우리 본성의 일부이면서도 그런 위선적인 굴레에 갇혀 있는 열정과 욕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모든 법과 윤리가 바로 그 위선적 구조에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마교수의 개인적인 신조의 진술이며 동아일보의 견해와는 다를 수도 있음이 밝혀져야 한다. 아직 이 땅에 너무도 많은 ‘문화적 촌놈’, 구제받을 길 없는 ‘위선자’, 그리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식의 자아분열증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그 다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10일자 A1면 톱기사가 아닌가 싶다.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옷로비사건 수사 축소은폐의 장본인으로 전청와대비서관 박주선씨를 바로 지목함으로써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주의를 돌리는 기사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이고, 그에게 사법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이 사건이 매듭지어진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조작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조작이 가능했는가이다. 이 나라의 권력 상층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기에 그같은 조작을 마음먹게 되었고 실행했으며, 또 일시적이지만 그대로 통용될 수 있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지금 이 사건과 비슷하게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는 듯한 조폐창 파업유도 사건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마녀를 찾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마녀를 낳게 한 구조가 파헤쳐져야 한다. 주인공의 이름과 얼굴만 바꾸어 되풀이되는 화형극에 우리는 신물이 난다.
그 다음으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동아일보 문화면 일반의 흐름이다. 오늘날 신문의 지면이 가진 위력은 여기서 새삼 과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별로 크지도 않은 박스기사 하나가 지금껏 승승장구해왔던 대중의 스타를 비참하게 침몰시키기도 하고 어제까지도 이름없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만들기도 한다. 그 이상 신문의 지면은 대중의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주고 더 심하게는 그들의 지향까지 결정한다.
그런데 요즘의 문화면은 진지함과 근본주의에 너무 인색한 듯 느껴진다. 문화의 바탕인 인문과학이 경원됨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장르 안에서도 진지함이나 예술적 순수성은 기피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디서나 눈길을 끄는 것은 감각과 현상에만 호소하는 대중스타들의 이야기거나 사소한 특이함의 나열이다. 이 또한 탈중심 혹은 권위해체라는 시대적 조류에 충실한 것이라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그게 바로 대중의 지향을 결정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특히 우리 청소년들이 키우는 꿈에 매혹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졌음을 감안한다면 요즘 같은 지면 안배는 재고돼야 할 것이다.
이문열<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