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날만큼은 국민의 관심은 정치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국여자농구 세계2위’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낭보에 온국민의 눈이 쏠렸다.
한국이 체코 프라하에서 벌어진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세계 2위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는 당시 공산국가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 처녀출전해 얻어낸 성과로 무엇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때 한 명의 ‘국민적 영웅’이 탄생했다. 우승팀 최고 스타에게 주는 관례를 깨고 준우승한 한국팀 주장이 대회 최우수선수(MVP)의 영예를 안은 것. 그가 바로 ‘한국농구의 여왕’ 박신자씨(58)다.
당시 한국팀의 평균신장은 1m68. 이에 비해 대부분 동유럽팀의 평균신장은 1m90을 넘었다. 1m76의 박신자를 앞세운 한국은 비록 당시 소련팀에게 패했지만 탄탄한 기본기와 두뇌플레이로 체코 동독 유고를 차례로 눌러 기술농구의 우위를 세계에 알렸다.
여자농구의 쾌거에 대한 온 국민의 열광은 실로 대단했다.
5월7일 선수단이 귀국하자 한국스포츠사상 처음으로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운동장까지 20㎞에 걸쳐 환영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 모인 인파만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3만여명.
숙명여중고와 상업은행을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 여자농구의 상징이었던 등번호 14번의 박씨는 세계대회 첫 MVP에 오르며 ‘국력의 상징’이 됐다.
그는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준 뒤 26세의 나이에 농구코트를 떠났다.
이미 64년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월드 베스트5’에 선정된 뒤 은퇴를 고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3년을 더 뛰다 최종결심을 한 것.
67년 11월2일. 그의 은퇴경기가 벌어진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7000여명의 농구팬이 운집, 대스타의 고별을 지켜봤다.
박씨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이화여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나왔고 주한미군 문관인 브래드너와 결혼한 뒤 도미,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대학원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78년부터 3년간 신용보증기금 여자농구단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도 했고 88서울올림픽때는 조직위원회 농구담당으로 행정과 외교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 32년. 그는 올해 국민에게 또한번의 자긍심을 심어줬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테네시주 락스빌에서 6월 문을 연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
요즘 박씨는 바깥일에 관심을 끊고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골프에 심취해있다. 올 7월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개막식 시구가 유일한 대외행사 참석.
8월 예일대를 나온 막내아들 앤드루가 하와이에서 결혼,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박씨는 ‘흰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건강한 할머니’로 불리며 행복한 삶을 살고있다.
▼내가 본 박신자▼
▽이성구(89·한국여자농구연맹 명예총재)〓박신자가 농구하는 것을 처음 본 때는 숙명여중 2학년때인 54년이었다. 당시 숙명과 농구라이벌인 진명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농구도 가르치고 있었는데 상대학교 선수지만 너무 잘해 반해버렸다. 당시 숙명여고선수단이 홍콩 원정경기를 가졌는데 중학생인 박신자의 플레이는 눈부셨다. ‘농구때문에 세상에 나온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김영기(63·한국농구연맹 부총재)〓박신자는 이미 숙명여고 1학년때부터 대적할 선수가 없었다. 타고난 키와 농구자질로 여자농구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여자농구가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 그의 큰 공훈이다. 선수시절 그는 성격이 투쟁적이라 가끔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승부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박정은(22·삼성생명농구단 선수)〓박신자씨가 친고모라는 것이 언제나 영광스럽다. 비록 고모가 뛰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농구선수였던 아버지로부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선수단복을 입고 택시를 타면 운전사가 농구선수냐고 물어본 뒤 ‘백이면 백’ 고모 얘기를 한다. 그러나 유명한 고모도 좋지만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고 요리솜씨가 좋은 정답고 푸근한 ‘자연인’ 고모가 더 좋다.
▼그때 이런일이…▼
주장 박신자를 비롯해 한국여자농구팀이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한 67년은 남북이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어 반공이 최우선했던 시절.
당시 적성국가인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열리는 대회에 한국팀이 참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였다.
적성국에 처음 발을 내디딘 한국선수단을 맞이한 사람은 북한 현지공관원들. 대회참가 자체를 방해하던 이들은 선수들이 묶는 호텔방에 매일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물을 집어넣고 심지어 선수들이 화장실에 갈때도 따라다니는 등 괴롭혔다. 급기야 이에 항의하던 한국선수단 단장은 대회 중반에 추방당하기도 했다.
결국 불안감을 느낀 대표팀은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인 유고전에서 78―71로 승리를 거둔 뒤 체육관 사무실에서 메달만 받고는 다음날 새벽 도망치듯 버스편으로 프라하를 떠났고 서독에 도착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전 창기자〉jeon@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