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마닐라에서 개최된 한중일 정상회담은 역사적으로 처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연결하는 한국의 가교적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나 한국 중국 일본을 잇는 연결고리는 유럽의 그것에 비해 약하다. 발전단계, 정치이념, 사회적 가치가 다양하며 인식의 차가 엄연하다. 그러나 한중일 3국의 협력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도 남을 당위성이 있다. 세계화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지역주의 추세에 대해 아시아 차원에서 대응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동양 3국 지도자가 만나기 직전인 15일에는 미―중간에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교섭 타결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서세동진(西勢東進)의 희생자였던 중국의 근대사는 기성 국제질서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으로서 WTO 가입은 ‘중단 없는 개혁’에 대한 약속이고 기회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중국은 국제사회 공통의 통상규범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주변의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이웃 나라와 더불어 지역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경제대국 일본이 지역협력의 견인차적 존재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얼마 전 외환 금융 위기를 겪은 동아시아이기에 더더욱 일본의 도량 큰 리더십이 기대된다. 일본은 지역협력의 새 시대를 위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이웃을 끌어안고 갈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이 지역협력의 조정역, 균형추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사회적 안정성, 모범적 경제운영과 더불어 지역협력이 국익에 필수적이라는 확고한 컨센서스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물론 한국 외교의 지주인 미국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를 보완하면서 입지를 넓히는 것이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북한을 한중일 협력의 틀에 동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한미 공조, 남북간의 건설적 대화와 더불어 동북아지역 협력의 틀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아시아 국가협력의 틀을 짜는데 유럽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협력의 장애물을 작은 것부터 넘어 높은 곳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와 협력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여 경계와 불신의 벽을 꾸준히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태익 <주 이탈리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