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98)

  • 입력 1999년 12월 15일 19시 42분


바로 내가 저녁을 샀던 이튿날 오후에 이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자기 집에서 저녁을 내겠다나요.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공원에는 일광욕을 하러 나온 젊은 남녀와 개를 데리고 나온 노인들 어린이들 가족들로 푸른 잔디밭이 울긋불긋 했어요. 나도 공연히 마음이 설레어 짧은 소매에 면바지 차림으로 두 번이나 나갔다 왔거든요. 창문을 열어 놓았더니 칠엽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지요. 누가 연습하는지 마즌편 건물의 창에서 플륫 소리가 맑게 흘러 나오다 그치고 다시 들리고. 이 선생은 여러번 전화 했다나요. 나는 그가 불러준 주소를 받아 적고 바로 어제 보았는데도 조금 흥이나서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독일에 와서 몇번 안되었지만 그날 저녁도 내가 치마를 입었던 날이에요. 아마 지금도 집의 옷장 안에 그 옷이 있을텐데. 콜크 같은 색에 기장이 정강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단순한 원피스예요. 헐렁해서 허리에 달린 끈으로 아무렇게나 묶는데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천은 붕대처럼 가녀린 인도 면이었을 걸요. 당신은 내가 새삼 옷 이야기를 하는 게 어쩐지 이상하지 않아요? 시청 앞 공터나 광장에서 열린 재래 시장의 옷 꾸러미 속에서 내가 찾아낸 거랍니다.

언젠가 우리 집 마당에 심었던 장미가 진디물이 너무 극성해서 다 잘라내 버렸어요. 겨우내 진갈색으로 말라붙은 짧은 가지가 땅 위로 조금 솟아올라 있을 뿐이었어요.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지난 해 장미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어요. 그럴 수 밖에, 그건 땅 위에 솟은 손가락만한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봄에 호미로 파헤치고 다른 일년초를 심었을 거예요. 채송화나 분꽃이나 백일홍이나 그런 씨앗을 뿌렸을 거예요. 여린 싹이 돋아나고 연두색이 초록으로 짙어지고 생기를 띄면서 가지와 줄기가 뻗고 풍성한 꽃밭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물을 주다가 나는 다투어 피어난 꽃들 사이에서 아주 작고 예쁜 꽃봉오리들을 몇 점 발견했답니다. 글세 고것이 장미였어요. 일년초의 싱싱한 가지를 젖히고 내려다보니까 그 짧은 막대기의 옆에서 푸른 가지가 곧게 뻗어올라 다시 꽃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

외출하기 전에 갈매기 무늬의 천이 드리워진 현관 앞에서 반신 거울 속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내 눈에 어딘가 물기가 반짝,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진한 커피를 연거푸 마셨을 때 같았어요. 밖에 나오니 어슴프레한 어둠이 깔리고 베를린의 고풍스런 가로등이 저녁의 습기 속에 켜져 있었지요. 나는 팔에 걸치고 있던 얇은 세타를 어깨에 둘렀습니다.

그의 집은 윌머스도르프에 있는 삼 층짜리 아파트였어요. 역시 천장이 높은 구식 건물이었어요. 침실이 하나 있고 거실과 부엌 공간이 넓은 그런 방이죠. 커다란 책상겸 식탁 앞에 앉았습니다. 컴퓨터와 책장이 있고 가구는 단촐했어요. 이 선생은 셔츠 바람에 가슴까지 올라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오븐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어요.

뭘하는 거예요?

내가 그의 등 뒤로 다가서며 물었더니 그가 나를 가볍게 밀어냈어요.

어허, 여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안되는데….

반댓말 놀이 하는 건가요?

신유교라구 아시는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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