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유재천/지금이 '언론 입막음'할 때인가

  • 입력 1999년 12월 16일 19시 28분


공정하지 않은 선거기사의 편집 취재 집필 업무에 종사한 자와 책임자에 대한 징계 또는 1년 이내에서 업무를 정지시킬 수 있는 선거법 개정안이 세상에 알려진 지 하루만에 백지화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개정안은 선거일전 120일까지 ‘선거기사 심의위원회’를 설치해 선거관련 기사를 심의하여 기사의 내용이 공정하지 않다고 인정될 경우 사과문 또는 정정보도문을 게재함과 동시에 이같은 벌칙을 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입법정치인 자질 의심▼

더욱 가관인 것은 말썽이 나자 여야 지도부가 서로 발뺌하기에 급급한 행태를 보인 것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인가 보다. 21세기를 며칠 앞둔 지금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발상 자체가 치졸한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입법하는 정치인들의 자질마저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방송매체와 신문매체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고백을 한 셈이다. 지상파 방송은 전파의 주인인 국민의 위탁을 받아 방송을 하는 것이므로 공적 책임을 다하도록 규제할 근거가 있는 것이지만 신문은 그렇지 않다.

바로 이 점을 간과한 까닭에 선거법 제8조의 2에 규정된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설치를 본받아 ‘선거기사 심의위원회’를 두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재조치 또한 방송법 제21조 제1항의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안이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매체의 차이를 감안하지 못한 결과다.

뿐만 아니다. 선거법을 개정하려는 사람들이 과연 현행 선거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정치개혁특위 국민회의 간사인 이상수(李相洙)의원은 15일 “선거보도의 경우 선거 종료 후의 반론보도는 실익이 없기 때문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의 권고안을 공동여당안으로 채택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동아일보 16일자 A4면).

반론보도를 얼마나 신속히 하게 하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선거법 제8조의 4(정기간행물의 선거보도에 대한 반론보도청구권)에 따르면 언론사가 반론보도청구를 받으면 48시간 내에 당사자와 협의하여 다음 호에 바로 반론문을 게재하여야 한다. 만약 협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때에는 언론사의 대표는 지체없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이를 회부해야 하고, 중재위는 48시간 내에 심의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선거종료 후의 반론보도는 실익이 없다는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거법의 이 조항 이외에도 선거기사로 인해 침해당한 사항을 시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또 있다. 정간물법 제18조 제8항은 ‘중재위원회는 정기간행물에 의한 침해사항을 심의하며 필요한 경우 당해 발행인에게 시정을 권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근거하여 선거 120일 전부터 선거기사에 대한 심의를 중점적으로 하고 신속히 시정권고를 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정 선거보도 노력을▼

이상과 같은 법적 장치를 도외시하고 언론인에 대해 1년까지 업무를 정지시키는 등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법 조항을 만들려고 시도한 것은 반민주적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정치개혁의 명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발상을 한 정치인들만 비난할 일도 아니다. 원인 제공자는 바로 우리 언론이라는 점도 자성해야 옳다. 그동안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언론의 선거보도는 항상 불공정시비를 낳았다. 특정 후보에 우호적이거나 혹은 불이익을 주는 편파보도는 물론 미확인 추측성 기사도 적지 않았다.

미국 신문들은 대통령 선거 때 사설을 통해 특정후보 지지를 선언하지만 기사는 공정하게 쓴다. 반면에 일부 한국 신문들은 특정후보 지지를 공표하지 않으면서 선거 때마다 특정후보에 기운 기사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추문폭로 흑색선전 비방선전도 여과없이 보도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발상을 한 정치인들을 비난하기 앞서 언론 스스로 공정한 선거 보도를 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언론 자신이 선거기사 자율심의기구를 선거 기간중 설치해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율이 없는 틈새를 비집고 타율이 들어왔던 경험을 다시 한번 상기할 때이기도 하다.

유재천<한림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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