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고문은폐'의 충격

  • 입력 1999년 12월 16일 19시 28분


김근태(金槿泰·현 국민회의 부총재)씨에 대한 경찰의 고문사실을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검찰발표는 충격적이다. 검찰 경찰과 옛 안기부는 김씨에 대한 고문의 진상을 숨기기 위해 합동대책회의를 열어 가족과 변호인접견권을 박탈했는가 하면 고문의 결정적 증거인 상처딱지를 빼앗아 폐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보도다.

고문의 야만성은 길게 얘기할 필요조차 없다. 당시 민청련 의장이던 김씨의 사상적 ‘색깔’이 어떠했는지, 어떤 실정법을 위반했는지 하는 문제는 이번 사안의 본질이 아니다. 집행을 눈앞에 둔 사형수에게도 인권은 있는 법이다. 비록 실정법에 걸려 형사처벌을 받는 상황에서도 기본적 인권은 철저히 보호돼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법의 정신이다. 더구나 검찰은 사건 수사와 공소제기라는 기본 업무 외에 국민의 인권을 최종적으로 지켜줄 막중한 책임이 있는 국가기관이다.

그런 검찰이 고문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85년 당시 경찰로부터 김씨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검사는 “김씨가 다리를 절어 고문의혹을 갖기도 했으나 본인이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아 수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검사는 인권보호 의무를 외면하거나 망각한 것이다. 또한 김씨의 고문상처 딱지를 압수한 구치소측의 보고에 당시 공안부장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대답해 폐기토록 한 것이 사실이라면 중대한 증거인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인들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니 철저한 진상조사가 요구된다.

아울러 정형근(鄭亨根·현 한나라당 의원)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은 경찰의 남영동 분실을 방문해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히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의원은 밖에서 부인만 할 게 아니라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는게 도리다. 본보 보도에 따르면 박종철군 고문에 연루됐던 한 경찰관은 당시 전두환(全斗煥)정권의 ‘체제전복세력 강력수사 지시’가 무리한 수사를 낳고 결국 한 학생의 희생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고문수사가 몇몇 경찰관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적 차원의 문제였다는 시각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김근태씨 고문사건도 마찬가지다.

고문은 언젠가는 진상이 드러나고 만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은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민주사회의 적(敵)인 고문을 영원히 단절하는 계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공소시효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역사적 진실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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