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윤식/절망속에서 피는 '시인의 상상력'

  • 입력 1999년 12월 17일 19시 23분


‘밀레니엄’이라는 상표가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이 질주하는 무서운 시간의 덩어리를 향해 눈이라도 흘겼다가는 당장 몽둥이찜을 당할 형세라 하면 과장일까.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맹렬한 시간의 괴물이 거리마다 사무실마다 타오르고 있다. 주식 투자 사업이 그것이다. 게임의 일종이기에 잃는 자와 따는 자가 없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열풍이 거리마다 사무실마다 휩쓸고 있음이란 무엇인가.

이 게임에 시인이 뛰어들었다면 어떠할까. 노모를 모시고 시 쓰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한 중년의 시인이 제법 잘 사는 누님의 권유로 주식꾼이 되었다고 치자. 누님이 준 종자돈으로 시작한 주식놀음에서 시인은 이런 저런 정보의 홍수 속을 헤엄쳐 보기도 하고 따기와 잃기를 거듭했을 터이다. 결과는 보나마나다. 종자돈까지 축내고 나자빠지지 않았겠는가. 더욱 난처한 것은 도사급 주식꾼인 누님도 여지없이 나자빠지지 않았겠는가. 시인에게 누님이 한 말은 이러했다.

“너무 실망하진 말아라. 넌 그래도 시인이잖니.”

이것은 ‘서편제’(1976)의 작가 이청준씨의 근작 중편 ‘시인의 시간’(1999)의 내용이다. 주식놀음에 이길 수 있는 장사가 있다면 시인뿐이라는 뜻일까. 현실에 늘 패배할 수밖에 없고 이 패배를 양식으로 하여 생존하는 기묘한 존재가 시인이란 뜻일까.

추호의 낭비도 없는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정보 언어 시대 속에서도 부질없이 자기 시간과 삶을 낭비하는 비효율적 비집단적 개인 언어에 매달려 살아가는 시인의 저주받은 운명의 업보를 내세우고 이로써 복수하겠다는 뜻으로 작가 이씨가 이 작품을 쓴 것은 물론 아니다. 주식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을 땐 저절로 그리고 당장에 다시 시인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에 대한 아픈 통찰이 이 작품의 참주제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시간이다. 현실의 시간에 대응되는 시인의 시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나라 문학판은 이 물음에 자주 그리고 썩 본질적으로 잘 대답해 주곤 했다. 소리를 붙잡아 두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소리꾼 부녀의 비극을 통해 작가 이씨는 시인의 시간을 묘사해 보였다. 그것은 제로(零)에 가까운 시간으로, 또는 말의 허무한 낭비를 아파함으로 요약된다. 그것이 유랑민의 상상력이라 함은 ‘서편제’ 3부작의 배경에서 말미암는다. 시인의 시간이 어찌 이에 멈추겠는가. 70년대 유신 말기 16세의 시골 소녀가 있었다. 세상을 바꿔 보려는 거센 바람이 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그 소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나 어떡해’를 듣고 있었다.

소를 키우고 병아리를 보살피며 사는 길밖에 모르는 부모들이 그럴 수 없이 원망스럽고 마당의 채송화도 미웠다. 헛간으로 간 소녀는 거기 놓인 쇠스랑으로 자기 발등을 찍었다. 발에 박힌 쇠스랑을 뺄 엄두도 못내는 이 소녀가 훗날 ‘외딴 방’(1995)을 쓴 작가 신경숙씨다. 제로에 가까운 시간, 농경민의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유랑민의 상상력과 농경민의 상상력으로 말해지는 곳에 시인의 시간이 은밀히 잠복한다. 이 시간이야말로 깃발처럼 펄럭이며 고속으로 치닫는 밀레니엄에 눈을 흘길 수 있지 않을까. 패배를 양식으로 하여 비로소 나래를 펴는 불사조의 넋을 닮은 시간이기에 그것은 그러하다.

김윤식(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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