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2)

  • 입력 1999년 12월 20일 19시 58분


여기선 오월 꽃에 알레르기 앓고 유월 비에 독감을 앓는다고 하지요. 날씨가 어떻게 변덕이 심하던지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정오에는 반짝 해가 났다가 오후에는 우박이나 눈이 오고 저녁에는 뇌성 번개가 쳤어요. 내게 몇번 전화가 왔었지만 나는 로프트 위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음성녹음만 흘러 나왔는데 저 아래서 아득하게 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지요.

예, 나 이희수예요. 몇 차례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궁금하군요. 혹시 어디 여행을 떠났나요? 하여튼 돌아오면 전화 좀 주세요.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마침 마리가 곁에 있을 때여서 그네에게 말했어요.

마리, 전화 좀 받아 줄래요?

그네가 받더니 수화기를 한 손으로 가리고 내게 물었어요.

유니, 리이라는 남자인데….

아아, 내가 몸이 불편해서 전화를 못받는다구 하세요.

마리가 독일어로 그에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리이는 누구야?

마리가 카밀레 차를 끓여 로프트 위로 올라와 내게 물었습니다.

요즈음 사귀게 된 남자 친구예요.

나는 마리 할머니가 내민 머그 잔을 받았는데 무거워서 손목이 쳐질 정도였어요. 한 모금 마시자 목젖에 탁 걸렸다가 내려가는 거예요.

아이 참, 차에다 위스키를 너무 많이 탔군요.

마셔요. 몸이 더워질 거야.

마리를 실망 시키지 않으려고 차를 억지로 한 모금씩 삼키면서 말했어요.

알콜을 조금 줄이세요. 식사를 빼먹지 말구요.

그래 알고 있어. 처음엔 난방비를 줄이려고 저녁마다 잘 때만 마셨는데 차츰 양이 늘어나는 거야. 그런데 그 남자 친구 얘기 좀 해줄래요?

나도 아직 잘 몰라요. 나이는 마흔 셋, 이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고.

오, 그건 관청 서류에 나오는 기록 아냐?

나는 맥없이 웃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해요?

내 느낌으로는 서로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마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네는 주름 잡힌 자기 콧잔등을 검지로 콕콕 찍어 보였죠.

여기로 알지. 나는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병 속에 보드카가 들었는지 시¿스인지 꼬냑인지 다 알아요.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는 거야.

마리는 슈테판이 요양원으로 가버린 뒤에 다른 남자가 없었어요?

왜…몇번 있었지. 가끔 만나던 평범한 의사도 있었고 가난한 연극 연출가도 있었고 마지막이 언제쯤이었는지 모르겠네.

그가 요양원에서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일인가요?

물론이야. 그건 전혀 다른 거야. 유니는 지금 감옥의 남자를 생각하고 있군. 잠 잘 때를 생각해 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어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카밀레 차에 넣은 스카치 탓이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조름이 왔어요. 마리가 내 이불깃을 여며 주었지요.

늘 같은 꿈을 꿀 수도 없고 그것마저 전부가 아니야. 잘 자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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