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답을 한다.
‘왜 야구선수가 됐느냐’는 질문에도 대답은 역시 한결같다.
장훈(59). 국내야구에 그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이는 없다. 사람들이 그를 ‘대단한 선수’라고 여기는 이유는 개인통산 3085개의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수위타자 7회 등 화려한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한국인의 기개를 외국에 떨친 ‘인간승리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장훈은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5세 때 화상을 입어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붙고 엄지와 검지가 굽어버렸다. 왼손타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듬해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큰누나를 잃었다.
하지만 이런 시련을 모두 극복하고 그는 최고의 야구선수로 올라섰다. 가난과 차별, 신체적인 어려움 등은 오히려 그의 집념을 자극한 동기가 됐을 뿐이다.
나니와상고 출신인 장훈은 고교 때부터 탁월한 기량으로 프로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았고 감독이 히로시마의 판잣집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는 정성을 기울인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스)에 입단, 프로에 입문했다.
데뷔 초반엔 프로 투수들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부진했으나 타고난 재질과 부단한 훈련으로 이를 극복해 시즌 중반부터 18세의 어린 나이로 4번자리를 꿰차 일본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매일 새벽같이 방망이를 들고 손에 피가 나도록 타이어를 두드리며 훈련한 일화는 유명하다.
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쳐 81년말 롯데 오리온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23년간 통산성적은 2752경기에서 타율 0.319, 504개 홈런에 1676타점. 그가 남긴 3085개의 안타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일본인 아내, 두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는 그는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현역생활 못지 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야구시즌 때는 일본 TBS TV의 명쾌한 야구해설가로 시즌종료 후엔 각 구단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돼 타격지도에 나선다. 뛰어난 강연으로 일본 경제계쪽에서도 인기가 높다.
“한시도 나의 뿌리를 잊은 적이 없다”는 장훈.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일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내가 본 장훈▼
▽이용일(원로야구인·전 쌍방울구단주)〓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이다. 골프 하나만 봐도 그렇다. 현역 때는 ‘야구선수가 무슨 골프냐’며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골프를 시작했는데 그가 골프치는 모습을 지켜보면 야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 하나하나에 혼을 싣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 필드에 자주 나가지 못하는 그가 지금 핸디캡 없이 골프를 친다는 사실도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는 항상 진지했고 승부근성과 열정이 넘쳤다.
▽이승엽(삼성라이온즈 선수)〓장훈 선배님을 알게 된 것은 어렸을 적 책을 통해서였다. 비록 글로 그분의 얘기를 접하게 됐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의 승부근성도 그분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올해 한일슈퍼게임에 출전하면서 처음으로 직접 뵙고 악수를 했는데 화상으로 인해 오른손가락이 붙은 걸 보고 감명을 받았다. ‘저런 손으로 어떻게 야구를 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귀화안한 이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귀화는 안된다.”
장훈이 끝까지 한국국적을 버리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어머니 박순분씨 때문.
그는 갖은 협박과 야유, 한국인으로서의 불이익을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대쪽같은 심지’는 흔들리는 아들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어머니 박씨는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심성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여성으로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운 여장부.
일찍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서 2남2녀를 키우면서 평소 “한국인임을 잊으면 안된다”며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일본팬의 야유를 받으면서까지 아들의 야구경기를 보러 갈 때면 꼭 한복을 차려입어 한국여성의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김상수기자〉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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