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박하사탕]순수한 꿈 찾아 과거로의 여행

  • 입력 1999년 12월 23일 18시 11분


낡은 사진첩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넘겨보듯,‘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은 순수했던 꿈을 찾아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영화다.

이 영화는 99년,삶의 벼랑 끝에 선 중년남자 영호(설경구 분)의 현재에서부터 20년 전인 79년 어느 봄날,그가 가장 젊고 찬란했던 시절로 거슬러가는 7개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만약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형식을 취했다면 ‘박하사탕’은 그저 범작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과거로 되돌아가는 이 영화의 서술방식은 기묘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젊어지고 세월의 때를 벗어가는 영호의 모습을 보여준다.그래서 현재의 그가 잃어버린 순수함의 가치를 더욱 절감하게 만든다.각 이야기마다 연결고리를 만들어 한 사건의 원인이 그 다음 이야기에서 설명되는 식의 구성도 절묘하다.20년을 넘나드는 연기를 무리없이 소화해낸 설경구의 열연도 빛난다.

영호의 과거여행은 80년 광주항쟁,80년대의 학생운동,90년대말의 경제위기 등 굴곡 심한 한국의 현대사가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켜왔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야학에 다니며 맑은 꿈을 꾸던 노동자였던 영호는 광주항쟁 때 진압군인이 되고 그뒤에는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형사가 돼 ‘가해자’의 편에 선다.

그러나 그의 일그러진 삶이 오히려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까닭은 영호 역시 역사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항쟁 때 얼결에 여고생을 사살한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는 그는 애써 위악적인 모습으로 사랑하는 여자 순임(문소리)에게조차 등을 돌린다.

만약 영호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더라면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까. 개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돌아갈 수 없는 과거,낫지 않는 상처도 있는 게 인생이 아닐까….

영화를 본 뒤 순수함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갖게 되든,인생의 어두운 면에 대한 비극적인 성찰을 하게 되든 ‘박하사탕’은 아릿한 통증을 남긴다.

18세이상 관람가. 2000년 1월1일 0시 개봉.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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