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결식아 여전▼
지하도를 걸어올라오니 곧 다른세상이다. 거리는 캐럴이 울려퍼지고 선물가게는 인파로 북적대고 호텔입구마다 반짝등으로 이루어진 대형트리며 장식품들이 대낮부터 멋을 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침에 못 읽은 신문을 펼쳐보니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받지 못해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방학을 안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 있다. 가끔 내가 어느 세상에 사는지 감이 안잡힐 때가 있는데 요즘이 특히 그렇다. 경기가 풀린 덕에 소비심리도 되살아나 백화점마다 쇼핑객으로 붐빈다는 말을 들은 자리에서 한달에 8만원도 안되는 돈을 배당받으면 다짜고짜 라면 한 상자를 먼저 들여놓고 본다는 소년소녀가장 얘기를 동시에 듣는다.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디에나 소년소녀가장 돕기라는 플래카드가 당당하고 버젓하게 내걸려있는 걸 보는 내 마음은 몹시 편치 않다. 편치 않을 뿐만 아니라 와락 화가 치밀고 거칠어지려 한다. 소년소녀 가장이라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말이 다 생겼는지. 나로서는 그들을 돕기 이전에 어떻게 소년소녀 가장이란 말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통하는 사회가 되었는지 이해가 안간다. 말이 좋아 소년소녀 가장이다. 어떻게 열세살 열네살, 어느때는 열살도 안된 아이들 앞에 가장이라는 말을 턱 하니 붙일 수 있는가. 그들이 어떻게 가장일 수 있는가. 소년소녀 가장이라는 말을 이렇게 버젓하게 쓰는 사회가 우리사회 말고 또 있을까. 기성세대들이 너무나 무반성적으로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며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피치 못하게 아이들만 남게 되었을 때는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을 맡을 양육처나 보호시설로 보내야 마땅하지 어떻게 어린애에게 가장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끼리 살게 하며 혹독한 인생의 신산한 꼴을 다 보게 한단 말인지. 더구나 열두어살의 어린애가 저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하나 둘 씩 데리고서, 이따금 텔레비전같은 데서 소년소녀돕기 차원으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달픈 삶을 낱낱이 보여줄 때마다 마음이 켕긴다. 어른들의 책임, 사회의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시킨 기분이 든다.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때까지만이라도 사회적으로 그들을 보호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러잖아도 상처투성이라 어른아이일텐데 돕자는 명목하에 그들로 하여금 삶의 부당한 고달픔을 낱낱이 내보이게 하는 것이 어쩐지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든다.
▼슬픈 성탄절 없었으면▼
그러기 전에 어쩔 수는 없는 것일까. 부모라는 울타리가 없으니 정서적으로 더욱 세심한 배려와 마음씀이 필요한 아이들 아닌가. 하기는 그러하고도 그들을 돕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하니 너무 앞선 마음일까.
새천년을 앞둔 세밑에 누군가는 기십만원씩 하는 프랑스 왕 이름이 붙은 포도주를 사가는가 하면 결식아동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는 자원봉사자 10여명이 온종일 떨며 모은 돈이 20만원도 안되는 지경이라고 한다. 호텔 뷔페식당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좌석이 없다 하는데 노숙자들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어두운 지하도에서 밥을 얻어 먹는다. 더욱 심해진 빈부의 격차가 실감나는 풍경들이다. 게다가 이번 세밑은 불우한 이웃들에겐 더욱 추운 세밑이라 한다. IMF가 닥쳤을 때도 올해처럼 이렇게 불우한 이웃에 대해 냉담한 경우는 없었다 한다. IMF가 끝났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 있다고. 거기에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몫 하는 건 아닌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다니는 미장원 아주머니는 손님이 없는 오전마다 마실가듯 가까운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의 머리를 깨끗하게 다듬어 주고 와서는 함빡 웃는다. 꽁꽁 언 마음을 풀고 내가 참여하는 좋은 풍경은 불우한 타인들이 쉬어가는 자리이다. 그런 자리들이 수두룩이 발생하는 세밑이기를.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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