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06)

  • 입력 1999년 12월 24일 18시 38분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에 나는 그가 내준 큼직한 운동복을 입었어요. 물받이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소리가 가까운 곳에 개울이라도 있는 것 같았죠. 내가 입고 있던 운동복의 목덜미며 가슴께에서는 면도 뒤에 그에게서 풍기던 스킨 냄새와 씨거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 냄새들은 이미 낯설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거실에서 달랑 하나 밖에 없는 골덴 천을 씌운 딱딱한 긴 의자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앉았고 이 선생은 좀 떨어져서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나무 탁자 앞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앉아 있었어요. 우리는 막 뽑아온 커피를 큼직한 머그 잔에 받아다 두 손아귀에 쥐고 마셨지요. 첫 모금을 마시는데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오히려 등덜미로 흠칫, 하면서 오한이 지나갔어요. 어쩐지 아랫배가 새큰하며 오줌이 마려워지는 거예요.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시다 말고 욕실로 갔어요. 일을 보고 나오려다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지요. 나는 도어를 잠근 채로 그에게 외쳤어요. 나 목욕 좀 할게요. 더운 물을 틀어놓고 그의 체취가 배인 운동복을 벗어 걸고 비누 거품을 타고 하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어요.

뭐예요?

헌데 나중에 생각해 봐도 나답지 않은 건 별로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지요. 그만큼 그와 나는 일상화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왔어요.

이거 받아요.

내가 문을 빼꼼히 열고 그의 손이 들어오도록 해주었습니다. 그건 가득히 따른 레드와인 한 잔이었어요. 그가 문 사이로 말했어요.

몸도 녹고 기분이 좋아질 거요.

나는 와인 글래스를 받아 들고 거품이 하얗게 덮인 욕조 안으로 들어갔어요. 물이 따끈하게 온 몸을 감쌌어요. 거품이 찰랑대는 머리맡의 욕조 가녁에 와인이 담긴 잔을 올려 놓고 몸이 차츰 풀려가는 걸 즐기고 있었어요. 잔을 가져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는데 혀 끝에서는 쌉쌀하고 시거운 맛이 감돌면서 내 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죠. 나는 오랫동안 중성이었던 겁니다. 일 년에 몇 번씩은 그런 욕구가 찾아오긴 했어요. 그렇지만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회복기의 환자가 상상으로만 입맛을 그리다가 물 한 잔 마시고 돌아눕는 것처럼 쓸쓸하고 단조롭게 잠이 들어버리곤 했어요. 여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이불 속에다 여분의 베개나 쿠션을 넣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딘가 잠자리가 휑해서 그래요. 내 몸의 양편에 그것들을 하나씩 놓고 이쪽 저쪽으로 돌아누울 때마다 다리를 올려 놓거나 팔을 둘러서 얹곤 했어요.

목욕을 끝내고 부연 김에 흐려진 거울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고 나서 다시 김이 서리기 전의 짧은 동안에 나는 어린 아이처럼 보얗게 달아오른 나의 여체를 보았어요. 나는 운동복을 다시 걸치지 않고 문 위에 걸린 타올 천의 흰 목욕까운을 입었습니다. 그의 까운은 내게는 커서 발끝까지 내려오고 팔도 두 번이나 걷어야 했지요.

나는 잠시 의자에 누워 있었는데 소리는 다 들렸지만 가벼운 가위눌림 같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온 건 씨거 냄새로 알았어요. 어쨌든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한참이나 서로 만지고 확인하고 함께 잤어요. 마치 그 일은 내게는 베를린의 한쪽에 불가항력적으로 완강하게 막고 서있는 장벽처럼, 가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벽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자가 벽이 보이기 전에 먼저 돌아서는 것과도 같이 두려운 일이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끝없는 벽의 가녁을 따라서 배회하는 사람들처럼 시작을 했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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