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성탄을 축하하고 또 새천년을 맞느라 들떠 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난리라지요. 그럴 만도 합니다.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 새로운 1000년이 시작된다니까요.
충북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이 산골에도 새 밀레니엄은 찾아오는가 봅니다. 송명은 노인(66)의 얼굴이 훨씬 밝아졌으니까요. 며칠전에는 “20세기에 세상에 태어나 21세기를 또 살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스물다섯살부터 ‘강직성 척추병’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누워 있는 노인네입니다. 척추가 연결돼 있는 목 아랫부분부터 골반 윗부분까지 굳어져 몸을 굽힐 수조차 없는 병이랍니다. 무릎 아래도 움직일 수 없고요. 노인은 40여년 인고의 시간을 증거하듯 온몸에 욕창 자국들을 훈장처럼 지니고 있습니다. 송 노인이 꽃동네 가족이 된 것은 87년6월 초여름이었습니다.
▼참뜻 기릴줄 몰라▼
아들 병시중을 들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온 것이지요. 그 후 송 노인은 자신이 기거하는 노인병동에서 환자가 있는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해서요. 새벽5시면 병원에 도착해 환자들에게 아침밥을 먹여주었습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없는 환자들에게 몇사람이 아침8시까지 식사수발을 들어주었지요. 점심과 저녁도 마찬가지로 오전10시부터 낮12시까지 또 오후4시반부터 6시까지 환자들의 식사수발을 도맡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힐 수도 없고 의자에 앉을 수도 없어 항상 보행기에 의지한 어정쩡한 모습이었지만 그러다가 송노인은 97년 2월 넘어져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됐습니다. 그날부터 송노인은 다른 봉사자가 떠주는 밥을 받아먹게 됐습니다.
“두손을 움직이는 것 외엔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던 내가 꽃동네 가족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밥 봉사였는데 아마 예수님께서 부족한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완전히 드러눕게 만드신 모양”이라고 말하는 송 노인에게서 언뜻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꽃동네에는 송 노인 말고도 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분들입니다. 또 한결같이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었던 분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저에게 사랑을 일깨워 줍니다.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에도 그 분은 말구유에 누워 이 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왜 오셨을까요.
성탄절이 되면, 아니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아니 아니 무슨무슨 날이 되면 우리는 들떠 흥청거리게 됩니다. 한도 많지만 흥이 많은 민족이라서 그렇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날을 기리는지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노는 날' 들뜨기만▼
한글날이나 국군의 날의 의미가 요즘 많이 퇴색된 것을 봅니다. 이 날들은 ‘노는 날’인데 그야말로 놀지 않게 되자, 몇몇 관계자가 기념식이나 하는 날로 돼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말구유 안에 누워 계신 천상의 아가를, 가장 귀하고 거룩한 분께서 말구유 안에 누워 계시다니 분명히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얼마전 서울에 올라갔다 길이 막혀 혼이 났습니다. 세기말 송년회 인파 때문이겠지요. 물론 성탄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겠고요. 그러나 온 가족이, 동료끼리 모여 송년이나 성탄을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한번쯤 혼자서 성탄의 참 의미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 보이고, 봉사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하는 많은 송노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웅진(꽃동네 신부)
《다음회 필자는 소설가 최윤(崔允·서강대 불문과교수)씨입니다.》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