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최재천/'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입력 1999년 12월 24일 23시 20분


우리 정부가 골몰해 있는 여러 망상 중에는 관광대국이라는 허황된 꿈이 있다. 일전에 영국 여왕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애써 하회마을을 찾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에겐 분명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만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 관광객들이 그런 곳에 가려면 이 복잡하기만 하고 개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서울이라는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외국여행을 해본 이들에게 물어 보라. 서울이 만일 남의 나라에 있는 도시라면 꼭 또 가 보고 싶은 곳이냐고. 고궁을 몇 채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로마와 같은 고도의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는 도시. 마천루의 숫자로는 결코 뒤지지 않지만 고층건물 사이로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마련한 토론토같은 곳도 아닌 어설픈 현대도시.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심심하면 외국여행이 너무 잦다고 국민만 나무란다.

건축가 서현은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에서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안고 있는 온갖 불합리들, 그러나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끈적끈적한 인간다움을 입심좋게 풀어낸다.

보행자보다 자동차가 우선인 교통풍습에 아예 인도까지 자동차가 삼켜버린 이 도시의 절규, 계획의 의지조차 포기한 우리 정부의 도시계획, 개발일변도의 정책에 무참하게 짓밟힌 우리들의 추억, 기와만 얹으면 전통을 되살렸다고 자위하는 우리 건축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은 너무나 상식적이기에 심오하기까지 하다.

생태학자인 내 눈에 비친 서울의 가장 큰 흉터는 바로 외국의 도시에 비해 나무가 너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얼마 전 우리 정부는 북한산에 관광호텔을 허가하겠노라고 발표했다. 서울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유일한 섬 남산을 제외하곤 홀로 이 도시의 허파 구실을 하고 있는 그곳을 또 처참하게 할퀴고 말겠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의 관리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다 온 사람들인가 의심스럽다. 서울에 무슨 나무가 이렇게 많으냐고 감탄한 사람은 몇 년 전 북한에서 귀순한 어느 여인뿐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최재천(서울대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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