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여파로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일에만 묻혀 살던 동료가 하나둘 회사를 떠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이제까진 모든 게 회사가 중심이 된 ‘기형적’ 삶이더군요.”
이 삶의 균형을 잡아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그래서 시작한 것이 ‘수첩 적기’. 수첩 한권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도대체 어떻게 수첩 정리를 했길래?
▼목표를 적어라▼
그의 수첩은 얄팍한 다이어리가 아니다. 300장이 넘는 두툼한 두께.
‘내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곰곰 생각해본 황부장은 직장생활에만 치우치지 않고 재테크 가정 자기계발 인간관계 여가 등에 24시간이 골고루 배분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수첩에 적었다.
올 새해 첫날엔 ‘행복한 가정생활’‘경제적 자립’‘건강한 몸과 정신’‘취미활동과 건전한 만남’ 등 7가지 목표를 적어두었다. 매일 아침엔 20여분을 투자,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로 나누어 하루 목표와 할 일을 쓰고 중요도에 따라 처리 순서를 쓴다. 물론 가장 먼저,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Planning’그 자체. 그리고 계획이 완료됐는지를 점검 또 점검.
“이젠 세상의 중심이 저와 아내 쪽으로 조금은 이동된 것 같아요.”
30일 여행을 떠나는 그는 이 수첩을 놓고 아내와 한 해 결산을 할 작정이다. 수첩에 나타난 그의 한 해를 재테크―가정생활―자신에 대한 투자로 나누어 들여다 보면….
▼돈관리▼
“수첩을 적기 전만 해도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투자는 커녕, 저금도 쓰고 남은 돈이 쌓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첩에 하루 지출을 꼼꼼히 쓰다보니 자신의 씀씀이와 가치관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건을 살 때도 꼭 필요한지 따져보고 샀더니 월평균 100만원이던 카드대금은 43만원선으로 줄었다. 이젠 매달 두어차례 사이버주식거래를 할만큼 재테크에도 열심이다.‘
▼가족형’ 인간으로▼
“오늘은 첫마디를 뭐로 할까…. 아침에 아내가 콜록였으니 ‘병원엔 다녀왔어?’가 좋겠군.”
그의 수첩엔 ‘퇴근하기 전 아내에게 건넬 첫마디를 5분간 생각한다’는 소목표가 적혀 있다.매일 이 계획을 지킨 건 아니지만 덕분에 아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집안 분위기도 놀랄 만큼 달라졌다.나에 대한 투자올 1월 처음으로 사인해 본 계약서에 따르면 연봉은 3390만원. 경기가 나아져 작년의 3167만원보다 약 7% 올랐다.
우선 4월엔 회사에서 ‘원하는’ 어학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어학원에 등록했다. 운동계획과 실천여부도 꼬박꼬박 수첩에 적어둔다.6∼9월엔 사흘에 한번(35번)꼴로 조깅했으며 기온이 떨어진 10월 등록한 스포츠센터엔 17번 참석했다.
전엔 여가활동이라야 부어라 마셔라가 전부였지만 이젠 취미를 즐길 시간도 ‘생겨났다’. 9월 동호회원들과 제주 북제주군 애월읍부터 90㎞를 롤러브레이드로 내달리기 위해 올 한 해 53일이나 연습했었다.
▼남들보다 2개월‘늘어난’1년▼
기자가 “혹시 수첩정리에 매달릴 시간에 다른 중요한 일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황부장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수첩을 쓰면서 내 삶의 효율이 20%정도 늘어났어요. 하루 20분 투자했더니 하루가 4시간이나 길어진 기분입니다. 지난 1년이 14개월이었던 셈이지요.”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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