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김영석 '나는 거기에 없었다'

  • 입력 1999년 12월 27일 19시 59분


가을걷이 끝난 텅빈 들판에

이따금 지푸라기가 바람에 날리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은

외딴 빈 집

이따금 낡은 문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와

바람에 낡은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는

누가 보고 들었는가?

시를 쓰는 내가?

나는 거기에 없었다.

―시집 ‘나는 거기에 없었다’(시와 시학사)

깊은 밤에 어떤 선생님이 팩스로 이 시를 보내주셨다. 손으로 또박또박 적어서 보내주셨다. 아침에 이 시를 읽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을 통과한 풍경들이 눈속으로 얼룩졌다. 아무도 살지 않은 그 빈집에도 밤이 지나갔겠지. 바람이 불었을게고 문이 흔들렸을게고 바람부는 들판에서 펄럭펄럭 지푸라기가 날아와서 마당에 떨어졌겠지. 어쩌면 우리가 잠든 사이 우리의 영혼이 그 집을 다녀왔을 수도…. 적요하고 쓸쓸한 우리의 영혼이 그 마당에 모여 수런거렸을 수도.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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