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그래도 세상을 넓게 보자

  • 입력 1999년 12월 27일 20시 48분


현역 군필자는 누구인가.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의 아들’(면제)도 ‘사람의 아들’(방위나 공익요원)도 아닌 ‘어둠의 자식’(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남자)을 가리킨다. 계급은 예비역 병장 또는 하사. 예비군 훈련 때마다 꼬박꼬박 재향군인회비를 징수당하는 것 말고 이들이 사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일은 없다.

그런데 딱 한 곳에서만은 특별한 우대를 받는다. 국가공무원이든 지방공무원이든 공무원 채용시험을 칠 때 그렇다. 제대군인지원법 제8조에 의거해서 과목별 만점의 3∼5%를 덤으로 받으니 이것이 바로 문제의 ‘군필자 가산점 제도’다. 취지야 좋다. 3년씩이나 국가안보를 위해 청춘을 바친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 사이의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군대 갈 의무가 없는 여성과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장애인들이 ‘남자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제도로 인해 막대한 불이익을 받는 것이다. 공무원 채용시험에서는 소수점 이하 점수 차이로 당락이 갈라진다. 그런데 경쟁자가 예비역 병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과목별 만점의 3∼5%를 덤으로 받으니 여성과 장애인들이 여기에 승복할 리가 만무하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정경식 재판관)가 “헌법과 전체 법체계에 비춰볼 때 기본질서 중 하나인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금지와 보호’ 원칙에 어긋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지난 23일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재향군인회(회장 장태완)는 ‘위헌 결정 규탄대회’를 열겠다고 한다. 재향군인회는 성명에서 군필자 가산점 제도를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손실 보전 방안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럼 다른 직업은 다 젖혀두고 유독 공무원 채용시험을 보는 현역 군필자만 손실을 보전받아야 하는지 묻고 싶다.

재향군인회는 공공단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이 단체의 회원이 되는 현역 군필자들은 ‘남성공화국’ 대한민국 남성사회의 압도적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의 압도적 다수파를 대표하는 공공단체가 법률적 판단과 관련하여 최고의 권능을 가지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겠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옹졸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헌재의 데이터베이스서버를 마비상태에 빠뜨린 남성 네티즌들의 볼썽사나운 행태를 보라. ‘군대 가지 말자’‘여자도 군대 가라’니? 누가 공무원 채용시험 군필자 가산점 혜택을 보려고 군대를 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공수부대 해병대 다 모여 헌재를 폭파하자’ ‘할복하라’ 이런 식의 욕설도 줄을 이었다. 재향군인회의 ‘규탄대회’는 이런 ‘사이버 테러’를 더욱 부추길 것이다.

어느 네티즌은 헌법재판관들의 병적사항을 들추어내면서 “2명은 질병으로 면제되고 한명은 일병 복무중 귀휴 전역했다는데 어떻게 재판관을 할 수 있느냐”고 했는데, 이건 이번 사태와 관련된 발언 중 단연 최악이다. 현역복무 여부와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직무수행 능력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쟁점과는 무관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냄으로써 논리싸움을 감정대립으로 몰고가는 전형적인 극우적 선동수법이다. 나한테도 똑같은 혐의를 씌울지 모르니 미리 밝혀두자. 나는 32개월하고도 하루를 강원도 전방에서 복무한 소총수 주특기 예비역 병장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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