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죽박죽 뒤섞인 판에▼
기실 이런 유의 드라마는 선거철만 되면 펼쳐지던 것이어서 별로 새로울 게 없다. 다만 여전히 의문인 것은 이 땅에 과연 보수말고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다른 세력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고작 민주화세력이냐, 근대화세력이냐를 놓고 색깔을 가르고, 진보성향이네 하면 지레 질겁을 하는 정치풍토에서 무슨 보혁구도라는지 모를 일이다. ‘보수원조’를 자처하는 자민련이야 그렇다치고 국민회의든 야당인 한나라당이든 3공에서 6공에 이르는 온갖 인물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판에 도대체 어느쪽이 보(保)고 어느쪽이 혁(革)이란 말인가.
(가칭)민주노동당의 권영길상임대표(58)는 이렇게 말한다.
“보수 대 개혁 세력이 합종연횡하는 큰틀의 정계개편은 바람직하고 그럴 경우 진보정당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 내년 총선이 지역주의가 극에 달하는 선거가 된다고 봤을때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은 어려운 국면입니다.”
권대표는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파리특파원을 지낸 기자 출신으로는 드물게 노동운동가로 변신해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을 거쳐 지난 대선때는 ‘국민승리 21’의 후보로 나서 30만 6000표(유효투표의 1.2%)를 얻었던 인물. 지금은 내년 1월말 정식으로 민주노동당 간판을 걸기 위해 뛰고 있다.
“하지만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는 만큼 이번이 원내진입의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지역구에서 1∼3석, 정당명부제가 된다면 거기서 2∼3석을 기대하는데 최악의 경우 지역구에서 1석이라도 얻어 원내에 진입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봐야겠지요.”
1959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 ‘진보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이 된 이래 한국의 진보정당은 제도정치권에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대중의 정서가 ‘진보’를 거부했고, 그들 또한 급진적이고 분파적인 행태 등으로 생존에 필요한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간판은 내리지 않아"▼
“만약 다시 한 석도 얻는데 실패한다면? 그래도 민주노동당의 간판은 내리지 않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말 그대로 당원이 주인되는 민주적 정당입니다. 지금 1만명의 당원들이 매달 1만원씩, 10억원의 당비를 내고 있어요. 모든 의사결정과정도 당원의 뜻에 따라 이뤄집니다. 보스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정당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앞으로 원내에 진입만 한다면 당원이 3만명 수준으로 급증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한국정치 개혁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겁니다.”
민주노동당은 현정권이 지난 2년동안 큰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눈앞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빈부 양극화 등 사회계층간 불평등구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머잖아 윗목에도 온기가 스며들 거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지상주의를 추구하면서 생산적 복지를 내세우는 것은 앞뒤가 맞질 않아요.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성장은 어찌됐든 분배만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도 해야지요. 다만 본질적인 개혁을 해야 합니다. 재벌개혁을 한다면서 재벌경제체제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그런 개혁이 돼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김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개혁 노력은 인정합니다. 하나 노동자와 서민은 지금 무엇을, 누구를 위한 개혁이냐고 반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세기에는 보수 일변도인 한국의 정치 지형에 ‘진보’가 자리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진정한 보혁구도의 작은 틀이나마 세워질 수 있을까. 주목해 볼 일이다.
전진우<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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