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의 대형 로펌들이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해외 비즈니스가 크게 늘면서 법률 자문을 해주는 해외 로펌이 수십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증권 발행 업무가 고작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외 매각이나 자금 조달 사례가 크게 늘면서 한국은 외국 대형 로펌의 황금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외국 로펌은 역시 미국계가 주류를 이룬다. 지난해 한국 정부의 외채 협상 과정에서 한국측을 대리한 클리어리 가트립 스틴 앤드 해밀턴(CGS&H), 해외 채권단을 대리했던 셔먼 앤드 스털링,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하는 업무를 맡았던 화이트 앤드 케이스 등이 최근 한국 관련 비즈니스에 자주 관여하는 로펌들이다. 이들 미국 로펌은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한국계 변호사를 앞장세우고 있다.
한국 법률시장은 해외 로펌에 대해서 아직 빗장을 풀어놓지 않고 있는 상태. 내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뉴밀레니엄 라운드 협상에서 법률시장 개방 문제가 본격적으로 테이블에 올려진다. 전문가들은 빠르면 2001년부터 법률시장 개방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법률 시장의 빗장이 풀리면 외국 로펌이 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거나 한국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뉴욕의 로펌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서울에 사무소를 차리겠다고 공언한다.
한국 로펌은 미국계 로펌에 비해 규모나 역사, 경쟁력에서 아직 상대가 되지 못해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국제경쟁력을 시급히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변호사 수만해도 국내 빅4 로펌으로 꼽히는 김&장 태평양 세종 한미가 각각 100명 내외. 그러나 미국에서 매출액 순위 2위의 로펌인 베이커 앤드 매킨지는 98년말 현재 변호사수가 2500여명에 육박한다. 스캐든 압스나 존스 데이 리비스 앤드 포그 등 5위안에 드는 로펌은 모두 1000명이 넘는다.
변호사만 많은 게 아니다. 올해 창립 125주년을 맞은 셔먼 앤드 스털링은 컴퓨터 테크놀러지나 신약개발, 기계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호사에게 자문을 해주는 리걸 어시스턴트만 150명을 두고 있다. 이런 전문성이 로펌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률시장 개방 이후 외국 로펌과 한국 로펌의 대결은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한국의 거물 변호사들을 대거 스카우트하면 대형 사건을 그야말로 외국 로펌이 싹쓸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해외 로펌들은 전세계적으로 ‘대형화’ 노선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올해 7월 이뤄진 영국의 클리퍼드 찬스와 미국의 로저스 앤드 웰스, 독일의 퓐더 폴하르트 베버 악스터 등 3개 로펌의 합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클리포드 챈스는 이 합병으로 세계 30여개 도시에 사무소를 개설한 세계 최대의 로펌으로 떠올랐다.
셔먼 앤드 스털링은 최근 1년간 200명의 변호사를 고용해 전체 850명으로 몸집을 불렸다. 경영을 맡고 있는 매니징 파트너인 와이트 피닷 변호사는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펴야 로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규모가 커야 전세계적으로 고객이 원하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규모의 경제’로 비용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국경을 넘나드는 비즈니스가 많아지면서 전세계적으로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를 펼쳐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업 활동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첨단화하면서 일반적인 법률 지식에 덧붙여 실무적인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도 로펌 대형화의 요인이다.
한 분야에 특화된 ‘전문성’을 무기로 생존하는 로펌도 수두룩하다. 뉴욕의 프로스 젤닉 러만 앤드 지수는 지적재산권 분야에 특화된 전문 로펌. 불과 50명이 채 안되는 변호사가 근무하지만 지난해 ‘유로머니 가이드 투 더 월드’가 선정한 상표권 전문 변호사 리스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14명의 변호사를 올려놓았다. 샤넬 EMI 질레트 할리퀸 IBM MTV 펩시콜라 리복 소니뮤직 티파니 월풀 등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프로스 젤닉의 고객들이다.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변호사들의 경쟁력은 어떤 수준일까. 뉴욕에서 만난 변호사들은 한결같이 전국의 수재가 몰리는 국내 사법 시험의 경쟁률에 혀를 내두르지만 전문성이나 외국어 실력 면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피력한다. 한국 변호사들과 직접 마주쳐본 경험이 있는 한 미국 변호사는 “한국 변호사들은 법률 지식이 뛰어나지만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한 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뉴욕〓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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