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과학기술에 종말은 없다

  • 입력 1999년 12월 30일 19시 22분


1000년 전 오늘, 서기 999년 12월31일 유럽의 농민들은 성당의 십자가 주위에 몰려들었다. 999년 한해 동안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가족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서기 1000년의 도래를 앞두고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세상의 끝이 임박했다는, 종말에 대한 믿음이었다.

종말론은 밀레니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밀레니엄은 1000년이라는 기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묘사된 천년왕국을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밀레니엄은 선과 악의 대결전(아마겟돈)이 벌어진 뒤에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그의 성도들과 함께 통치하는 1000년의 기간이다. 1000년 동안의 천국이 어느 때라도 도래하기를 바라는 천년왕국주의는 결국 종말신당을 부추겼다. 이를테면 서울의 다미선교회나 일본의 옴진리교는 최후의 심판과 예수의 재림을 학수고대한다.

세계의 종말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공포의 개념이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를 불바다로 만든 원자폭탄 투하이다.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은 인간 스스로 지구의 파멸을 초래할 위험을 증대시켰다. 가령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게다가 인간의 부주의로 오존층 구멍이 갈수록 커지고 지구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인류의 생존에 적신호가 켜지고 종말론은 인류 전체를 괴롭히는 저주가 되었다. 세기말에 종말론의 악령이 출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학이라고 해서 세기말에 풍미하는 종말론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이 자연 현상을 이해하여 궁극의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 끝이 보인다고 주장하는 종말론은 순환론적 세계관에서 연유한다.순환론자들은 과학이 생명체처럼 태어나서 성장한 다음에 노화되어 죽는다고 믿기 때문에 과학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보는 것이다.

순환론 지지자들의 전범이 되는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독일의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30대의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집필한 ‘서구의 몰락’이다. 슈펭글러는 모든 시대에서 인류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전제하고, 인류의 문화는 식물이 봄에 싹이 터서 겨울에 죽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순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20세기는 잔혹한 황제 치하의 로마제국에 상응하므로 서구 문명은 예술이건 과학이건 더 이상 희망이 없이 겨울의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슈펭글러는 서구의 과학적 사고가 발전의 한계에 봉착하는 운명의 시기를 2000년으로 추정했다.

한편 과학계 일각에서는 과학적 발견의 위대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단언한다. 이들은 2500년전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제기된 질문들, 예컨대 우주의 기원이나 뇌의 기능은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과학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능사는 아닐 터이다. 과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가령 암 따위의 질병 연구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내일로 시작되는 제3의 밀레니엄에는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과학기술이 되길 기원한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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