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악수의 계절'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다시 악수(握手)의 계절이다.

4·13 총선 출마희망자들은 이제 마주치는 유권자마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전례 없이 경쟁이 치열할 것이란 전망이어서 악수하는 손들은 그만큼 더 분주하리라.

지난 연말 출판기념회를 가진 여권의 K씨는 하루내 앓아누웠다. 지역구민을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축하객들을 일일이 악수로 맞다보니 손과 팔이 붓고 오른쪽 다리까지 마비가 돼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악수란 어떤 면에선 고통스러운 ‘의식’이다. 횟수를 셀 수는 없지만 국회의원이라면 하루 100∼200회의 악수는 보통이다. 의정보고회나 합동연설회라도 있는 날이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6선을 한 국민회의의 이만섭(李萬燮)총재권한대행은 “선거철엔 악수하느라 오른 손과 팔이 부어 붕대를 맨 채 왼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고 지지를 호소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로선 의아스럽지만 미국에선 위생문제도 곧잘 제기된다.

2000년 대선 출마를 검토 중인 부동산왕 도널드 트럼프는 ‘악수 혐오론자’로 유명하다. 그는 악수를 “야만적이고 불결하며, 감기를 옮길 수도 있는 접촉”이라고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공화당 대선주자로 거론됐던 전 미적십자사 총재 엘리자베스 돌도 청중과 악수하고 나면 꼬박꼬박 손을 씻었다고 한다. 악수가 힘들다 보니 요령도 생긴다. 3공, 5공의 권위주의시절엔 ‘청와대식 악수’라는 것도 있었다. 악수를 하되 상대방의 손 속에 자신의 손을 완전히 넣지 않고 손끝만 가볍게 찔렀다가 빼는 식이다. 권력의 오만함과 가벼움이 배어있던 악수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수란 좋은 것임이 분명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수는 평화 우호 친절을 상징한다. 인류학적으로도 악수는 원시인들이 자신의 오른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음을 상대방에게 보여줌으로써 서로 친구임을 확인하고자 한데서 비롯됐다.

정치인에게 악수는 중요하다. 멋진 악수 한번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다. 악수란 정치인이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유권자들에게 가장 손쉽게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악수를 배우가 연기하듯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에티켓 전문가들은 악수를 잘 하려면 “상대방의 손을 적당한 힘으로 잡고 3,4회 흔들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눈을 0.5초 정도 응시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마음이다. 유권자들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과 악력(握力)만으로도 후보의 진실성 여부를 쉽게 감지해낸다.

새해, 악수의 계절에 우리는 어떤 악수를 해야 할까. 총선 출마 희망자라면 국가발전에 대한 신념을 손에 가득 담고 악수를 해야 보기에도 좋을 듯싶다. 주권자로서의 유권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까지 손을 타고 전해질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어디 정치인 뿐이겠는가. 올해엔 누구든 제대로 된 악수 한번 해보자. 마음과 마음이 진하게 흐르는 그런 악수를 해보자. 손을 맞잡고 상대방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본다면 안풀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재호〈정치부 부장대우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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