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린 옐친시대]민주화 '빛'가린 부정부패 '그림자'

  • 입력 2000년 1월 4일 19시 42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은 3일 크렘린 행정실(비서실)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둘째딸인 타티아나 디야첸코 이미지 담당보좌관과 드미트리 야쿠쉬킨 크렘린 대변인 등을 해임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볼로쉰 크렘린 행정실장(비서실장) 등 대부분의 옐친 측근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푸틴은 크렘린 안에 옐친의 집무실을 두고 예전의 경호 의전 공보팀이 계속 옐친을 보좌하게 하는 등 예우를 하고 있다.

야쿠쉬킨은 옐친이 당분간 해외방문과 정치인 접촉 등 정치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을까. 8년여 동안 계속된 ‘옐친시대’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푸틴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자마자 ‘전임 대통령 일가 보장에 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옐친 일가가 경호 의전 의료 등의 혜택을 그대로 누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지만 핵심은 옐친이 앞으로 형사 및 행정상의 책임을 지거나 수사 또는 탄핵의 대상이 되지 않는 면책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부분이다.

옐친의 원죄(原罪)는 무엇일까. 공산당 등 야당은 옐친 재임기간 동안 수차례 옐친탄핵안을 제출했으나 번번이 근소한 표차로 부결됐다. 탄핵안의 주된 내용은 △옐친이 옛소련을 국민의 동의없이 해체했으며 △93년 10월 당시 최고회의(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유화과정에서 특혜 등 정경 유착이 심화됐다는 것 등이다. 91년 12월 당시 소련 15개 공화국 중 하나인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던 옐친은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함께 일방적으로 소련 해체를 선언했다. 옐친은 “소련해체가 역사적 사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크렘린궁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옐친은 93년 10월에는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던 최고회의가 반(反)개혁적이라는 이유로 탱크를 동원해 강제 해산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지금까지 당시 의사당 근처에서 농성하며 진상조사와 ‘살인마’ 옐친 처단을 요구하고 있다.

시장경제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경 유착 심화와 부정부패 역시 옐친의 큰 짐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97년 세계 200대 부자 중에 러시아 재벌총수가 6명이나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10년 전만 해도 재산이 1만달러도 되지 않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개인재산을 모으는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 당시 포브스의 평가였다.

사유화 과정에서 알짜배기 국영기업을 헐값에 인수한 것이 러시아 재벌의 성장 배경이다. 여기에는 권력의 비호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스위스 검찰은 최근 1500만달러 규모의 스위스 내 러시아 계좌를 동결시켰다. 스위스 검찰은 이 계좌 중 일부가 옐친의 가족이나 측근의 것으로 보고 있다.

옐친 일가의 앞날이 불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딸 타티아나를 비롯해 그의 남편 레오니드(사업가)와 옐친의 맏사위 발레리 오쿨로프(최대 항공사 아에로플로트 사장)는 그동안 끊임없는 부패 의혹에 시달려왔다.

옐친의 후계자인 푸틴의 고민도 ‘과거청산’과 ‘개혁의 계속’이라는 2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권한대행으로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3월 대선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이 되면 여론에 밀려서라도 대대적인 구시대 청산작업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경우를 보아도 옐친이 감옥에 가거나 해외를 떠도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전망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시대를 겪었던 러시아인들은 무자비한 정치보복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고 푸틴 역시 ‘옐친 사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옐친시대’를 청산되어야할 부끄러운 과거라고 매도할 수만도 없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의 설계자였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박사는 옐친 재임 중 그에 대한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이렇게 일갈했다. “당신들이 옐친을 마음놓고 비난할 수 있는 시대를 연 것은 바로 옐친이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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