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이 회사 내부정보를 밖으로 유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회사안팎에 파다하게 퍼졌고 급기야 이 소문이 고위층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 이유. 회사측은 직원들에게 ‘업무상 취득한 비밀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했고 앞으로 만나는 모든 외부인사에 대해 일일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비즈니스현장에서 ‘정보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기업마다 생존차원에서 정보보안을 최우선 업무지침으로 내세우고 첨단보안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철통보안’에 사운을 걸고 있다.
기업들이 이처럼 보안에 민감해지는 이유는 구조조정 이후 극심해지고 있는 경쟁, 특히 국경을 초월한 경쟁에서 산업스파이 등에 의한 정보유출이 잇따르면서 심각한 ‘보안불안’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
▼실태1-감시하는 회사▼
국내기업 가운데 ‘보안’에 관한 한 가장 철저하다는 삼성전자는 최근 산업스파이 사건이 잇따르면서 지난해 말 다시 한번 대대적인 보안시스템 정비작업을 벌였다. 사옥에 입주한 외부업체들을 모두 5층이하로 내려보내고 5층 이상은 외부인의 경우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 탑승부터 통제한다.
층마다 보안요원을 배치해 출입자들을 철저히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며 직원들도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신분 조회 후에야 출입이 가능하다.사내 정보망의 단속도 한층 강화해 직급별로 패스워드를 부여하고 팩스 전송도 수시로 검색, 정보유출을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철통보안’의 추세는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 서울 강남구 포스코빌딩에는 건물요소 요소에 100여대의 CCTV와 인체센서가 24시간 작동된다. 엘리베이터 내부에도 작동되는 CCTV는 직원들과 외부방문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전 LG그룹의 한 계열사는 지난해 직원들이 퇴근 후 택시에서 별 생각없이 나눈 대화를 ‘몰래카메라’로 녹화해 며칠 뒤 사내방송을 통해 전사원에게 공개한 적이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실태2-감시당하는 사원들▼
이처럼 철통보안이 회사측의 지상과제가 되면서 정작 감시대상이 되는 사원들은 ‘무차별적인 보안강화’가 오히려 행동반경을 좁히고 자율성을 위축시켜 업무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불만이다. 보안이 체질화되지 않은 직원들은 사소한 실수에도 회사측의 지적과 경고를 받으며 ‘보안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S전자에 다니는 H씨(27)는 지난해말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플로피디스켓을 아무 생각없이 가방에 넣고 퇴근길에 나섰다가 출입구 검색대의 보안검사에 걸려 혼쭐이 났다. H씨는 “실수로 개인용 디스켓을 넣었으니 한번만 봐달라”며 사정했지만 결국 인사과에 이 사실이 통보돼 경위서를 쓰고 벌점을 먹어야 했다. 이후 H씨는 퇴근길마다 스스로 가방검사를 한 뒤 사무실을 나서는 등 ‘보안과민증’에 시달리고 있다.
P제철에 다니는 회사원 유모씨(45)도 “보안이 강화되면서 회사내 동선(動線)에 일일이 신경을 써야하는 등 오히려 업무에 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면서 “직장내 동료를 만날 때도 솔직히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안보▼
이에 대해 기업과 보안시스템업체측은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보안후진국”이라며 “산업스파이가 판을 치는 마당에 자칫 기업정보의 유출은 국부의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안강화는 필요악”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보안시스템이 오히려 직원들의 자율성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낸다고 지적한다. 각부서와 개인별로 요구되는 보안수준이 다른데도 이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다보니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것.
대한전기학회 인텔리전트빌딩시스템위원회 임상채 전문위원은 “선진국은 쾌적함과 보안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경향이지만 우리나라는 기업의 필요성보다 경쟁사의 보안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하는 등 즉흥적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시스템의 기본 인프라를 갖추되 보안등급에 따라 필요사항만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등 유연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