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5)

  • 입력 2000년 1월 4일 19시 42분


우리는 화면에서나 아니면 실제로 타관의 어느 공항에서 북한 사람들을 그 행색과 기미로 알아채듯 동독 사람들을 알아 볼 수가 있었어요. 그들은 이를테면 깊숙한 두메나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읍내에 나온 사람들처럼 어딘가 서툴고 어릿어릿해 보였지요. 아직은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들은 그저 어슬렁 어슬렁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번화가를 거닐고 있을 뿐이었어요. 서쪽 시민들은 바깥 바람을 쏘이러 장벽 사이로 빠져나온 동쪽 시민들을 웃는 얼굴로 환영했어요. 나중엔 한 달이 채 못되어서 서쪽 시민은 그들을 멸시하고 귀찮아하게 되었고 동쪽 시민은 보다 만만한 외국인에게 눈총을 돌리게 되지만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여전히 동베를린 경비대원들이 초소를 지키고 있었지만 군중들은 벽의 곳곳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벽 위에 올라가기도 했어요. 몇 군데의 초소와 전철 역을 통해서 동베를린 시민들은 서쪽으로 마음대로 나올 수가 있었지만 동베를린을 방문하려는 외국인이나 서베를린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스트라세 역에서 통관 절차를 밟아야만 했지요. 그리고 자동차에 탄 사람들은 미군과 서독 군이 지키고 있는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수속을 해야만 되었어요. 나중에는 시민들과 정부가 차례로 담을 헐어버리고 말았지만.

우리는 문 옆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갔는데 전에는 판문점처럼 관광 명소여서 거기 철제로 만든 사다리와 전망대가 있었죠. 전망대 위에는 한 사람도 올라가지 않았어요. 동전을 넣고 들여다보는 망원경도 벌써 폐물이 되어 버렸나 봐요. 그리고 전망대에서 가까운 녹지대에 철망이 울타리처럼 서 있고 거기 흰 페인트칠을 한 십자가들이 매달려 있어요. 넓적한 십자가 한 가운데에 사람의 이름과 연도와 날짜가 씌어 있지요.

이건 뭐야….

장벽을 넘다가 희생된 사람들이래.

땅굴 같은 거로구나.

내 생각엔… 좀 다른 거 같은데?

뭐가 달라, 자유세계의 반대쪽을 질타하는 고함 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튼 산 것들은 보다 살기 적합한 데루 이동할 자유가 있잖아.

자유를 추상화 하지 마라. 뒤 마려워 봐, 그 순간부터 나는 속박된다구. 돈 없이 어디서 자유를 찾아. 이들은 자신이 속했던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양보하며 나누어 누리던 자유를 타락시킨 거라구.

이쪽이 낙원이 아니듯이 저쪽도 낙원이 아니었어. 이제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야.

우리 세기의 약속들을 지켜내야만 할 거야.

송영태와 나는 그런 겉도는 이야기만 하면서 주변을 돌아다녔습니다. 오후 네시가 되자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지고 우리는 여전히 축제 분위기인 중심가로 나왔어요. 바로 앞에 아이들을 거느린 두 부부가 걷고 있었는데 우리는 대번에 그들이 서쪽 바람을 쐬러 나온 동베를린의 가족들임을 알아 보았죠. 그들은 아이들의 손목을 꼭 잡고 보도의 안쪽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어요. 중심가에는 그런 이들이 더욱 많았어요. 밤이 깊어지면서 늘 그렇듯이 여섯 시가 되자마자 가게와 백화점들은 문을 닫고 쇼윈도우 앞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는데 마네킹들만 물건들 사이에 남아 있고 인적은 보이지 않아요. 우리는 그 인적 없는 무수한 상품 더미와 조명이 찬란한 쇼윈도우를 자본주의의 창이라고 불렀죠. 아, 이제 보니 그 말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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