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새천년]인간 게놈 프로젝트

  • 입력 2000년 1월 5일 20시 00분


인간이 ‘생명의 설계도’를 손아귀에 쥐는 일이 이제 초읽기 단계에 들어섰다. 한두해 사이에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완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비용 30억 달러. 1960년대 미국이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기 위해 추진한 ‘아폴로 계획’ 이후 최대규모의 프로젝트다.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의미는 난치병 치료에 있다. 백혈병, 치매, 심장기형 등 유전자 이상으로 생기는 수많은 난치병이 정복될 가능성이 커진다. 정상 유전자와 질병 유전자에 관한 데이터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정보는 불과 우표 크기의 유전자(DNA)칩에 담긴다. 사람의 세포 하나를 떼어내 유전자칩에 반응시키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몇시간 안에 드러난다. SF영화 ‘가타카’에서 손가락 피 한방울로 유전정보가 순식간에 판독돼 본인 여부를 알아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유전자칩은 바로 이런 영화적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지렛대다. 만약 비정상 유전자가 발견되면 건강한 유전자로 대체해 간단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은 일상생활에 적지 않은 불편과 혼란을 낳을 수도 있다. 사람이 아는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다.

▼유전자 차별▼

현재 미국의 많은 보험회사들은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객의 현재 건강 상태는 보험료 책정에 중요한 요소다. 만일 개인의 유전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을 훨씬 잘 알아낼 수 있다.

40대에 심장질환으로 돌연사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고 치자. 현재 아무 이상이 없는 20대 젊은이도 이 유전자를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훨씬 비싼 보험료를 물어야 할 것이다. 실제 미국의 일부 보험회사는 임신한 피보험자에게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토록 압력을 넣고 있다. 선천적 신체장애의 위험이 크면 아이의 보험 혜택을 철회하겠다는 의도에서다.

개인의 유전정보는 일자리를 구할 때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회사는 언젠가 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고용을 당연히 꺼린다. 진취성이나 대인관계 같은 인간성마저 유전자 검사로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 일부 기업이 전매특허처럼 내세우는 ‘술자리 면접’ 같은 것도 불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배우자 선택에도 유전자가 중요한 검토항목으로 떠오른다. 머리 좋고 튼튼한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 앞으로는 학력과 건강진단서 대신 유전자의 ‘질’을 파악하고 상대를 선택하는 ‘유전자궁합’의 시대가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맞춤아기▼

환자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제거하고 정상 유전자를 삽입하는 치료술이 세계 의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1990년 미국에서 최초로 유전자치료가 실시됐다. 유전자 결함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4세 여자 어린이에게 정상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삽입했던 것. 유전자치료는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성과를 활용해 21세기 최첨단의학으로 우뚝 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흥미롭게도 유전자치료의 대상은 사람 형체를 갖추지 못한 수정란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예 부모의 정자와 난자, 또는 초기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자를 검사해 아기가 병에 걸릴 ‘싹’을 제거하자는 의도다. 이 방법이 성공하는 순간 대를 이어 집안을 괴롭혀 온 가족의 병력은 종말을 고한다.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자치료를 받을 경우 그 자손은 더이상 질병 유전자를 전달받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정상 유전자 대신 ‘좋은’ 유전자를 넣을 가능성이다. 자식이 우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부모의 마음. 이왕이면 높은 지능과 뛰어난 예술적 감성, 건강한 체력, 그리고 준수한 외모를 갖춘 ‘맞춤아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현재의 기술로 이를 실현하려면 수백만달러가 든다. 우수한 유전자를 갖춘 아기는 정부나 특정기업, 또는 몇몇 부자에 의해 우선적으로 실현되리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미래는 소수의 우성(優性) 인간과 다수의 열성(劣性) 인간이 구분되는 새로운 계급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열성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유전자 특허▼

1998년10월 미국 특허청은 생명공학 벤처기업인 인사이트사에 이색 특허를 내줬다. 세계 최초였다. 특허의 대상은 다름아닌 유전자. 이후 미국과 일본의 유수한 벤처사들은 특허를 먼저 내려고 혈안이 돼 있다.

한 과학자가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발견해 특허를 받았다고 하자. 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용으로 이 유전자를 사용할 때 병원측은 그에게 비용을 내야 한다. 이때 과학자는 마치 부동산처럼 유전자 소유권을 병원측에 팔 수도 빌려줄 수도 있다.

원래 특허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물질이나 기술을 ‘발명’하는 행위에 주어진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자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일이 과연 특허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요즘 추세를 보면 대답은 분명하다. 유전자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따르기 때문에 그 노고를 인정하자는 게 미국,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 등지의 특허청의 입장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10만개 유전자의 구조가 밝혀진다. 그러면 이들에 대한 10만건의 특허가 나올지도 모른다. 난치병 치료를 위해 유전자를 사용할 때마다 일일이 비싼 특허료를 물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가 선진국 일부 기업에 큰 이익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희망인가 공포인가?▼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결과는 희망인가 공포인가. 이 ‘두 얼굴’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 스스로도 이미 인식하고 있다.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196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은 1988년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는 탁월한 조직력과 지도력을 발휘, 이 프로젝트를 본궤도에 올렸다.

하지만 왓슨은 활동 초기부터 이 프로젝트의 부정적 영향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프로젝트 연구비의 일부를 유전자 연구가 사회에 미칠 영향 연구에 할애하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미국 에너지부와 국립보건원이 지원하는 윤리·법·사회관계(ELSI) 프로그램. 말 그대로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초래할 부정적인 문제를 다루는 연구다. 왓슨은 유전자에 특허가 매겨지는 것이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1997년 11월11일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29차 총회는 ‘인간 게놈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을 186개 회원국 전원의 찬성으로 채택했다. 이 선언문은 “유전 연구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이때부터 게놈 프로젝트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세계적으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연구와 선언만으로 이 프로젝트의 부정적 파장이 멈추거나 해소되지는 않는다. 연구 성과를 어디까지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문제도 사회 구성원들이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세계의 많은 NGO(비정부기구)는 맞춤아기 탄생과 유전자 특허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큰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보험료 책정이나 고용에 유전정보가 활용돼서는 안된다고 법으로 규정할 정도다.

결국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성과를 인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지금 희망과 공포의 갈림길에 서 있다.

▼키워드-게놈(gemome)▼

미국 에너지부와 국립보건원이 주축이 돼 1990년 10월1일부터 인간 유전자의 전체 구조를 밝히기 위해 진행중인 프로젝트. 원래 2005년 완성 예정이었지만 벤처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특허를 신청하는 바람에 완료시점을 2003년으로 앞당겼다.

그럼에도 올해 또는 내년중 연구를 완료하겠다는 벤처기업들이 있는 상황이니 귀추를 지켜볼 일이다.

게놈(genome)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 두 단어를 합성한 말로서 생물 세포에 담긴 유전정보 전체를 뜻한다. 유전정보는 DNA에 담겨 있고, DNA는 A(아데닌) C(시토신) G(구아닌) T(티민) 등 4종류의 염기를 가진다.

사람의 몸에는 대략 30억개의 염기가 있다. 염기 배열이 잘못되면 생리 기능에 이상이 생겨 몸에 질환이 발생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주요목표는 30억개 염기의 배열순서를 밝히는 일.

따라서 이 프로젝트로 인간이 얻는 정보는 빙산의 일각이다. 30억개 염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리고 사람마다 염기서열이 어떻게 다른지 밝혀져야 비로소 완벽한 생명의 설계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김훈기 과학동아기자기자>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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