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미행…협박… "스토커 표적 국경없다"

  • 입력 2000년 1월 7일 00시 48분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겁이 나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요. 이제 혼자 다니는 건 상상도 못합니다.”

영화배우 최진실씨(31)는 98년 12월 영화 ‘마요네즈’ 촬영을 끝내고 새벽 3시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오다 어둠 속에서 정체 불명의 남자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이 괴한은 그녀의 비명을 듣고 쫓아온 매니저 P씨와 격투 끝에 줄행랑을 쳤다.

이 사건으로 최씨의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외출할 때면 가족이나 소속 사무실에 장소를 꼭 미리 알려주고 6개월에 한번 꼴로 집 전화번호를 바꾼다. 최근에는 누군가 휴대전화에 남겨진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미리 청취하는 사례가 많아 비밀번호를 수시로 교체한다. 요즘도 “진실씨를 좋아한다. 결혼하도록 도와달라”며 어머니에게 떼를 쓰는 전직 교수 등 3명의 남성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연예인의 스토킹 피해 사례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수 김창완은 극성 팬 S씨에게 11년이나 시달리다 결국 코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남의 작품을 표절했으니 사회에서 매장시키겠다”며 가수 심수봉을 3년6개월간이나 스토킹한 무명 가수 N씨는 얼마 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됐다.

스토킹은 연예인은 물론 ‘보통 사람들’까지 위협하고 있는 신종범죄다.

캘리포니아주는 91년 미국에서 최초로 스토킹 관련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스토킹을 ‘계획적이며 고의로 반복해서 다른 사람을 쫓아다니며 싫은 짓을 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강북삼성병원 백상빈교수(정신과 전문의)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스토커들은 대부분 자기애(自己愛)적인 욕구를 좌절당한 경험이 있고 다른 사람과 대등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백교수는 “스토커들은 초기에 적절하게 치료받지 못하면 중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반(反)스토킹법이 제정된 것은 89년 당시 21세의 여배우 레베카 셰퍼가 남성 스토커에 의해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계기가 됐다. TV에 출연한 모습에 반한 이 스토커는 셰퍼의 집에 찾아가 만나달라고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흥분해 권총을 꺼내 쏘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쥬라기 공원’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스토커의 ‘표적’이 됐다. 97년 7월 스필버그의 자택 근처에서 수갑과 칼, 스필버그의 가족사진 등을 지닌 스토커가 경찰에 체포됐다.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도 스토커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테니스 스타 모니카 셀레스는 경기 중 뛰어든 스토커의 칼에 부상을 당했다. 골프스타 타이거 우즈와 미국 프로농구(NBA) 스타 데니스 로드맨도 스토킹 피해자인 것으로 보고됐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49개주에서 차례로 반(反)스토킹법이 제정됐다. 96년 제정된 ‘주간(州間) 스토킹 처벌 및 방지법’은 위험한 스토커가 다른 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여러 주가 관련된 스토킹 사건을 다루고 있다.

98년 11월에는 연방 반스토킹 확대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스토킹의 범위를 인터넷 E메일 등으로 확대하고 재범은 금보석(金保釋)을 어렵게 해놓는 등 스토킹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플로리다주에서는 경찰이 스토킹이 있었다고 정당하게 판단하면 영장없이 스토커를 체포할 수 있으며 9개주에서는 미성년자 스토킹을 가중처벌하고 있다.

실제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여성 12명 중 1명이, 남성 45명 중 1명이 스토킹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미국에는 20만명의 스토커가 있고 이들로 인해 매년 전국에서 170만명이 피해를 입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에서도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에 대한 스토킹 피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99년 5월 삼성생명 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성인 7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8%가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스토킹의 표적은 크게 △스타 △저명인사 △옛 사랑 △보통사람 등으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보통사람에 대한 스토킹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미행 편지 전화 선물 등 간접적인 방법에서 집이나 사무실 방문, 협박 감시 밀착 미행 폭행 살인 등으로 발전하는 사례도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인터넷상에서 ‘사이버 스토킹’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PC통신의 나우누리 홍보실 윤설아대리는 “상담원에게 신고가 들어온 스토킹 건수는 매달 3,4건 정도인데 신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감안하면 훨씬 많을 것”이라면서 “인터넷 스토킹이 현실로 이어지는 사례까지 나타날 정도로 심각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반스토킹 법률 제정이 추진되고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가 법률 제정의 걸림돌이다.‘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여성의 침묵은 예스’라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스토킹의 범죄적 심각성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전병하변호사는 “반스토킹 법률의 입안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토킹의 행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이다”라고 말한다. 스토킹 관련 법령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면 일반인이 판단하기 어려워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반대로 구체적이면 스토커들이 이를 이용해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스토킹은 사랑이 아니라 범죄라는 인식”이라며 “스토킹에 관한 법률 제정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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