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당국무관심-시민부주의로 훼손 '백제都城'

  • 입력 2000년 1월 13일 19시 11분


1500년 전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행정당국의 무관심과 시민들의 부주의로 나날이 파괴되고 있다.

사적 제11호인 풍납토성에서는 최근 ‘대부(大夫)’라는 고대 궁중 최고의 관직명이 새겨진 토기가 출토된데 이어 왕궁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까지 발굴돼 관심을 끌고 있다.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이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길 때까지 493년 동안의 백제 왕성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잇따른 아파트 건축 등으로 유적이 계속 파괴되고 있어 정부의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2,3세기경 축조 추정◇

▼문화재적 가치▼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된 길이 4㎞의 성벽, 44만평의 성 내부, 성 외곽을 감싸고 도는 해자(垓字) 등으로 구성돼 있다.

풍납토성의 규모는 폭 40m, 높이 9m로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자갈과 흙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 만든 성)이다.

2,3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한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백제 초기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규모의 토성을 쌓기 위해서는 고도로 집중된 중앙권력이 수십만명의 인력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4세기에 백제가 고대국가를 완성했다는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말 ‘대부(大夫)’라는 글귀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되고 최근에는 종묘나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이 그동안 위치문제로 논란을 빚어온 백제의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발굴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신대 박물관 권오영(權五榮)교수는 “풍납토성을 발굴하면 화산재에 묻혀 고스란히 도시 원형이 보존됐던 이탈리아의 폼페이처럼 백제 초기의 유적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며 “이같은 대규모 유적의 존재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재개발 막을 근거 없어◇

▼보존 실태▼

63년 외곽 성벽만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성 내부는 일반에 불하됐다. 현재 성벽 가운데 1920m는 없어졌고 2080m만 남아 있다. 성벽의 절반 정도는 시유지이지만 나머지는 사유지. 국가사적지로 지정돼 개발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주로 채소밭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토성 내부는 일반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단독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찬 인구밀집지역으로 현재 1800여채의 가옥에 4만1000여명이 살고 있다. 성벽만 아니라면 이곳이 백제의 왕성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 재개발 붐이 불고 있다. 지금까지 이 일대에는 동아 한가람, 한강 극동 등 13개 단지 41개동의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공사가 진행중이거나 심의중인 아파트도 경당연립 등 5개 단지 24개동이나 된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현행법상 일반주거지인 이 지역의 재개발을 막을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97년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 백제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화려했던 풍납토성의 흔적이 현재 땅속 4∼5m 깊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

최근 왕궁이나 종묘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된 곳도 경당연립 재개발 현장이다. 따라서 유물과 유적을 현장에 보존하지 못하고 발굴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권교수는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발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문화재 파괴 행위”라면서 “경주보다 오래된 고도의 유적이 개발 논리에 밀려 파괴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건설회사나 재개발조합측은 유적 발굴 비용을 본인들이 부담해야 하는데다 공기가 늦어질수록 재산상 피해가 커지기 때문에 발굴작업을 빨리 끝내라고 종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발굴단은 한겨울에 발굴작업을 진행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벽매입예산 태부족◇

▼보존대책 미비▼

현재 풍납토성의 보존은 일단 서울시가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보존과 발굴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시는 올해 성벽을 매입하기 위해 50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놓았지만 앞으로 500억원 정도가 더 있어야 성벽을 완전히 매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 관계자는 “올해 매입 예산으로 116억원을 올렸지만 시의회에서 50억원으로 삭감됐다”며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등 중앙정부는 사실상 방관하고 있는 상태. 이는 88년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맺은 양해각서 때문이다.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담배소비세를 시로 넘겨주는 대신 풍납토성의 보존 발굴 등 현안은 시가 책임지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이 각서를 근거로 풍납토성 문제는 전적으로 서울시의 책임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시는 양해각서를 맺을 당시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풍납토성이 국가 사적인 만큼 정부가 상당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 등 다양한 보존책을 검토하고 있다”며 “그러나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를 규제하는 것인 만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정보·권재현기자> suhchoi@donga.com

▼전문가 의견▼

전문가들은 풍납토성 일대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아파트나 고층건물의 신축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은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 일대의 땅을 가능하면 많이 사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李健茂)학예연구실장은 “우선 유적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땅을 깊게 파야 하는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성 내부뿐만 아니라 성 주위의 해자(垓字)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도 개발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권구(金權九)대구박물관장은 “일단 풍납토성 일대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더 이상의 유적 파괴를 막으면서 주민들의 재산권을 최대한 보호하는 방법으로 정부가 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보존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가 땅을 모두 사들이는 것이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 서울시는 성 내부의 땅을 매입하는 데 5조원 가량이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문대 역사학과 이형구(李亨求)교수는 “충남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는 모두 합쳐 봐야 200년이 채 안되지만 풍납토성은 초기 백제에서 중기 백제까지 500년 동안의 왕성이었다”며 “공주 부여의 백제문화권 개발에 1조5000억원을 투입하는 것과의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풍납토성의 보존에도 상당한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경우 1963년 오사카(大阪) 인구밀집지역에서 7세기경 아스카(飛鳥)시대 궁성인 난바(難派)궁의 유적이 발견됐을 때 국가가 나서서 도심지 땅을 사들인 뒤 유적지 전체를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서정보·권재현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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