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6)

  • 입력 2000년 1월 17일 20시 06분


이제는 온 세상으로부터 유폐되어 있는 당신

정말이지 사는 게 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렇게도 아슬아슬 맘을 조리고 있던 말을 그가 꺼냈어요.

오 선배는 어떡할 거야.

뭣땜에 니가 그런 걸 물어?

하면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고 말았죠.

니가 뭔데 묻는 거야? 니가 그들을 알기나 해?

내 가슴 속에서는 격렬한 말들이 들끓으며 솟음쳐 올랐어요. 십 년 전에 아버지의 젊은 날 같은 어떤 그림자가 내 보호를 받으려고 나타났어. 나중엔 그맘때의 모든 젊은이가 짊어져야 했던 자책감 때문에 서로 의지하려고 했었다. 그는 어두운 창 넘어 저쪽으로 사라졌고 벽에 아무렇게나 연필로 끄적거린 그림처럼 시간의 바람과 먼지에 바래져 갔다. 그는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거기는 부재의 장소일 뿐이다. 불굴의 신념이란 건 없어. 살아내기 위한 한오라기 명 줄 같은 거야. 나는 사생활을 탈환하고 싶었어. 아무도 간섭할 사람 없는 조용한 생활을. 내일은 서울로 그에게 전화를 할거야. 내 속에서 부글거리던 말들은 그냥 어두운 목구멍 속에서 넘쳐 나오지 못하고 가슴을 향해서 천천히 빠져나갔습니다. 변기의 물이 가라앉듯이. 그리고 끅끅거리는 억제된 소리가 새어 나갔어요.

잘못했어, 미안해….

송영태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어요. 나는 자리에 누웠는데 그제서야 당신이 나를 다시 찾아 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신의 얼굴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내가 갈뫼에서 그렸던 젊은 날의 당신의 얼굴은 다시 묘사해낼 수가 있었어요. 내 붓 자국과 나이프로 건드린 눈동자 속의 가느다란 터치까지도. 이제는 온 세상으로부터 유폐되어 있는 당신.

이튿날 영태를 중앙역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와서 어쩐지 가슴이 빈 병처럼 되어서 방안을 서성대다가 건너편 마리 클라인 할머니의 방으로 갔습니다. 초인종을 여러번 눌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요. 돌아설까 하다가 도어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더니 발소리가 나는 것 같고 도어의 렌즈로 내다보는 느낌이 들더군요. 문이 조금 열렸어요. 나는 문을 잡아당겼지요. 목욕 까운 바람의 마리가 서 있었는데 귀신 같았어요. 백발의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늘어뜨렸고 화장기도 없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었거든요. 농담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얼결에 그네의 허리를 안고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히고 나도 곁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역시 탁자 위에는 반쯤 비워진 술병과 마시다 남은 잔이며 물컵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어요. 나는 그네를 더 이상 술 때문에 비난하지 않기로 진작부터 작정을 해버렸거든요. 그냥 한숨을 쉬었죠.

마리, 또 식사를 하지 않았죠?

먹었어, 많이 먹었어.

나는 그네와 말다툼을 않고 직접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보았더니 소시지와 우유와 버터가 조금 있었어요. 시리얼 대신 곡물 가루가 있어서 우유에 묽게 타가지고 나왔죠. 마리의 턱 밑에 대고 한 술씩 떠먹이니까 처음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던 그네가 한모금 넘기고 나서는 잘 받아 먹더군요.

밤새도록 혼자서 술만 마셨어요?

아니야… 뭘 좀… 그렸어.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