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7)

  • 입력 2000년 1월 18일 20시 23분


소파 아래 아무렇게나 펼쳐진 손바닥만한 스케치북이 뒤늦게 눈에 띄었어요.

전에 보았던 그림들 뒤에 몇 페이지인가 비어 있었고 다시 독일어로 낙서가 몇줄 보였어요.

인간의 삶은 한편의 시와도 같아 그것은 시작이 있는가 하면 종말이 있다, 단지 전체가 아닐 뿐.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자들 앞에서 두려워 하랴? 아, 죽은 자들이여 그녀를 쉬게 하라.

낙서를 읽고 나서 뒷장을 넘기니까 연필이나 볼펜으로 그린 그림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나는 그네의 그림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다 몇 가지의 중요한 기호를 알고 있었죠. 동그라미 뒤에 여러 가닥의 선을 그은 길다란 물체는 마리 자신일 거예요. 그네는 애들 그림에서처럼 몸통 아래에 삼각형을 달고 있는데 아마 치마인 듯 해요. 그대신 슈테판은 그냥 동그란 머리에 작대기 같이 길고 삼각형이 없는 걸로 보아 바지 차림이겠지요. 작대기 남자를 직선을 긋고 아래쪽으로 그어진 빗금 안에다 눕혀 놓았어요. 슈테판이 죽어 땅 속에 묻힌 게 아닐까. 역시 직선 위에 마리가 서있고 털뭉치도 옆에 있어요. 꼬불꼬불한 선이 이어진 꼴이 개줄에 매인 한스겠지요. 그네는 한스를 데리고 슈테판의 묘에 갔다는 소리겠지요. 그런데 털뭉치 위에는 무슨 작은 구름이 떠있었어요.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마리에게 물었습니다.

마리 이건 뭐죠?

그네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 쉰 목소리로 킬킬 웃었어요.

그건 한스의 모자야. 죽은 것들이 머리에 얹고 다니는….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죠. 아, 후광이로구나. 그럼 죽은 한스를 데리고 죽은 슈테판의 묘지에 간 셈이었구나. 결국 이건 혼자 남겨진 마리 자신의 그림이로군. 마리가 자기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어요.

한스는 오래 살았어. 열 다섯 살까지 살았는데 나는 녀석을 한번도 요양원에 데려가지 못했어. 슈테판은 나도 못알아볼 지경이었구 기차를 타구 가야 했으니까. 한스가 슈테판보다 먼저 죽었어. 그 다음 장을 봐.

삼각형 치마를 입은 마리가 화살표로 직선을 가리키고 있어요. 직선은 땅일텐데 그 옆에 올챙이처럼 꼬리 달린 동그라미 같은 것들이 떼지어 모여 있고 사각형이 놓여 있어요. 나는 스케치북을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알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건 뭐예요?

마리는 처음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받았어요.

그냥 선일 뿐이야.

이 화살표는 뭐예요?

그네는 말없이 잔을 가져다가 술을 따랐어요. 내가 눈치를 채고 얼른 잔을 채뜨려서 손아귀에 쥐었어요.

그만해요. 이건 내가 마실 거야.

오오 유니도 나처럼 취하면 서로 통하게 될지두 몰라.

기대하지 말아요. 당신의 술과 내 술은 달라요.

내가 한 모금 마시고 내밀었더니 그네는 나머지를 단숨에 털어 넣었어요. 나의 어깨너머로 스케치북을 넘겨다 보며 마리가 말했습니다.

화살표는 삽이야. 상자 안에는 한스가 들어 있어. 나는 녀석을 마가렛이 만발한 정원 아래 묻어주고 싶었는데….

당신은 요즈음 한스만 생각하고 있어요?

아기를 생각해.

그 녀석은 개였잖아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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