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김정수/성질급한 남자로 살기

  • 입력 2000년 1월 18일 20시 23분


나의 고향은 대구다. 경상도 남자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러나 나는 좀 심한 편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모두 똑같은 것을 보니 집안 내력이라고 했다.

여기에 거의 매일 수술실에서 빨간색을 접해야 하는 일의 성격 때문에 더욱 쉽게 흥분하는 것 같다. 침착하게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말과 행동이 갑자기 나와 망신당하고 손해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두고온 아내▼

98년 10월 일본 정형외과 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을 때 일이다.

발표 1시간을 위해 슬라이드 200장에 대학노트 2권 분량의 영문 원고를 마련했다. 긴장이 된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적당량의 세 배나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새벽 6시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9시반에 깨어났다. 숙소에서 학회 장소까지 걸리는 시간은 35∼40분 정도. 학회 개회 시간은 10시. 이건 정말 국제적인 망신이었다.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신주쿠역에서 내려 도쿄여자의대까지 눈썹이 휘날리게 달음질쳤다. 주최측에 지각한 사정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한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김선생님, 사모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도 급한 마음에 초행길에 일본말을 전혀 못하는 아내를 지하철에 두고 혼자 내린 것이다.

▼절교선언▼

아내와 연애한 지 1년쯤 됐을 때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맞은 편에서 자꾸 이쪽을 보는 남자가 있었다. ‘속좁다’란 말을 듣기 싫어 내색은 안했지만 기분이 상했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오는데 그 남자가 아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영인이와는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아, 예∼.”

5분 뒤 그 남자가 자리를 뜨자마자 아내에게 한마디 툭 던지고 나와버렸다. “너,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마.”

알고보니 그는 집사람의 어릴 적 과외 선생님이었다.

▼내 딸 내놔라▼

95년 5월15일 둘째를 낳을 때였다.

첫째가 아들이라 이번엔 딸이길 바랬다. 다행히 평소 안면이 있는 의사도 딸이라고 은근히 암시했다.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간 지 6시간이 지난 새벽 3시경 간호사가 “득남하셨습니다”하는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원장실로 달려가 원장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 원래 딸인데 왜 아들이냐. 애가 바뀐 것 아니냐.”

원장은 “같은 의사끼리 이거 왜 그러느냐”라며 나를 진정시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 그 시간대 그 병원에서 애를 낳은 산모는 아내 밖에 없었다.

▼날릴뻔한 500만원▼

매년 1월1일이면 사위 5명이 가족과 함께 처갓집으로 모여 차례를 지내고 외식을 한다. 20∼25명의 식사값만 100여만원이었는데 매번 큰 형님이 계산을 했다.

96년에는 아내가 “당신도 한번 내라”고 해 식사를 마칠 때 쯤 화장실 가는 척하고 재빨리 110만원을 지불했다. 누가 볼까봐 10만원권 11장을 후다닥 세준 것이 화근이었다. 전세계약을 하고 남은 500만원짜리 수표가 딸려 들어간 것이다.

7년전엔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집계약을 한 적이 있다. 남들 다 알아본다는 주변지리와 개발 가능성 따위는 전혀 따지지 않았다가 결국 수천만원 손해봤다. 친구에게 “D산업이 앞으로 전망이 좋다”는 말 한마디 듣고 그날 즉시 D산업주를 샀다가 거액을 날리기도 했다.

▼007영화의 한 장면▼

딱 한번이지만 급한 성격이 도움이 된 적도 있다.

89년 3월 경북대 의대 인턴시절. 3층 중환자실 환자를 1층으로 옮기던 중 침대 바퀴가 헛돌면서 침대가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산소탱크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가스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담배라도 피웠다면 가스폭발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판이었다.

수십명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지만 나는 재빨리 산소통이 굴러가는 쪽으로 달려가 가스밸브를 잠갔다. 이후 교수님마다 나를 ‘영웅’이라며 치켜세웠다. 앞뒤 재지 않고 일단 덤비고 보는 성격이 수많은 생명을 살린 것이다.

▼성격은 나의 운명▼

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기원에 다녔지만 3개월을 못 넘겼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바둑판을 보고 천천히 생각하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 기체조를 시도했지만 이것도 실패했다.

천천히 말하면 느긋해진다고 해서 홍사덕의원을 흉내낸 적도 있다. “어디가 (한 박자 쉬고) 아프십니까?”

그러나 이 방법도 별로였다. 그나마 최근 효과를 보는 것은 돈 문제 등 중대사를 결정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천천히 ‘하나 둘 셋’을 세고 행동하는 방법.

그래도 나는 끝까지 ‘성격 고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는다. 습관은 성격을 바꾸고 성격은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침착해질 때가 있다. 수술이 있는 날이다. 이날 아침에는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는다. 식사도 왼손으로 하고 출근시 불가피하게 가방을 들어야 할 때도 왼손을 사용한다. 1㎜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는 것을 뼈속 깊이 새기고 있으므로.

(안세병원 척추센터소장을 겸하고 있는 김부원장은 국내 최초로 ‘흉강경 수술법’을 도입했으며 척추수술만 1만2000여회 시술한 신경외과 전문의다.)

<정리=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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