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찬욱/선거법 재협상 이렇게 하자

  • 입력 2000년 1월 19일 20시 13분


정치개혁의 실현이 참으로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광야에서 홀로 외치듯이 선거구제 개혁을 주창한 것이 1년 반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의 정당에 속한 의원들부터 개혁의지가 곧바로 결집되지 않았다. 여권은 내부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수개월을 보내고 새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야당과의 협상에서 그것이 다시 변경됐다. 정치권에 과연 비전을 가진 응집된 개혁주체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선거가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선거법 재협상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선거법의 공정성은 물론 다른 개혁목표 실현을 극대화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현행 제도를 기준선으로 해 개혁목표에 어느 정도 다가서는 ‘만족화(滿足化)’만이 가능할 것이다.

정치권은 국민에게 약속한 대로 의원정수 축소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 사실 우리 국회의 의원정수는 인구수 대비로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다. 의원정수는 공공부문 구조조정 차원에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의원정수 자체보다는 의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정치적 제스처로서 지킬 의사도 없었던 약속을 했다. 이 약속을 저버리면서 비난을 자초했다.

1인2표제 합의는 지켜져야 한다. 전면적인 소선거구제가 아니고 비례대표제가 부수적이나마 결합하게 되면 실질적인 비례대표제를 운영해야 한다.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정당투표가 없으면 직접선거 원리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정당투표는 유권자에게 정당에 대한 평가 기회를 부여하고 정당들이 상호 차별적인 정책정당으로 변하도록 촉진할 수 있다. 4대 지방선거를 동시에 실시한 경험이 있으므로 제도의 도입에 따른 관리상의 문제점은 최소화될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지지도의 상승을 보인 한나라당은 대승적 차원에서 1인2표제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구 후보를 복수 정당이 연합해 공천하는 것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를 명문 규정으로 금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규정이 암묵적인 선거연합까지 규제하기가 어렵거니와 정당활동을 위축시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우려와는 달리 수도권에서 여권의 연합공천이 대거 성사돼 야당을 위축시킬 것으로는 전망되지 않는다.

지역구 의석수 비율은 현재 수준보다 축소돼야 한다. 비례대표제를 가미하는 제도에서는 이런 방향의 개선이 타당하다. 선거구 획정의 기존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다분히 자의적으로 인구의 상하한선을 정하고 기존 선거구의 통폐합에 미온적이면 지역구수는 늘기 십상이고 애초부터 공정성 시비가 잉태된다. 지역구 의석수를 사전에 정하고 선거구당 평균인구를 산출해야 한다. 이를 기준으로 60% 편차를 가감해 상하한선을 정하면 최대와 최소 선거구 인구비가 4 대 1이 된다. 기준이 세워지면 예외란 전혀 없거나 그 불가피성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인정돼야 한다.

인구산정 기준일에 관해서는 편협한 법리(法理)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선거 직전의 선거구 획정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99년 6월로 기준을 잡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선거구획정위원회안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14대 국회에서 획정위안은 묵살됐고 15대 국회에서는 획정위 구성조차 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중입후보 허용과 석패율(惜敗率) 적용을 재검토해야 한다. 일본 제도를 보고 잔재주로 모방한 인상이 짙다. 이 제도는 중진의원들에게 유리하다. 특정 지역에서 취약한 정당의 후보가 패배한 뒤에 비례대표 선거로 부활한다고 해도 그는 지역구 의원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비례대표 의원과 달리 해당 지역구의 현역의원과 공개적으로 마찰을 빚을 것이다. 이 밖에 기존 87조의 폐지, 비례대표 봉쇄조항의 완화, 현행 공소시효 유지가 요청된다.

시간적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정도를 걷는 선거법 재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박찬욱(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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