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용기에 자극받은 흑인들은 버스 타기를 거부하며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돌입했고 이 일련의 움직임은 인종차별 폐지를 향한 위대한 행진의 첫걸음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17일은 “나에겐 꿈이 있다”는 감동적 연설을 앞세워 이 운동을 축제로 이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탄생 71주년이었다. 반세기 전의 저항정신을 오늘 ‘자유와 정의와 평등’에의 헌신으로 승화시킬 것을 다짐하는 추모 열기가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이 뉴스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국내 조간신문들의 앞면을 장식한 19일, 같은 지면엔 우리 시민운동단체들의 ‘불복종운동’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우리의 시민운동은 지금까지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해 온 게 사실이다.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경실련), 소액주주운동과 국정감사 모니터(참여연대) 등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시민운동 10년의 주요 업적을 대충만 꼽아봐도 그 성격과 지향에 짐작이 간다.
그런 마당에 로자 파크스와 킹 목사의 ‘불복종’ 정서가 이 땅의 시민과 시민운동가들의 등을 떠민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절박한 목소리로 입법자들에게 부패방지와 정치개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계속 그러면 재판정에 세우겠다’는 을러댐뿐이었다. 게다가 2년 가까이 말만 무성했던 선거법 개정작업이 참담한 협잡으로 막을 내리자 시민의 분노는 심상치 않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아, ‘말’만으로는 안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분노의 공감대’로 확산되고, 이것이 다시 기왕의 낙천낙선운동을 중심으로 ‘불복종의 정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낙선운동이 그 위법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모든 조사에서 80%가 넘는 지지도를 유지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확인된다.
남는 문제는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얘기되는 불복종운동은 어디까지나 선언과 정서일 뿐 말 그대로 운동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점이 그것. 불복종운동의 최종방편이 ‘스스로 위법행동을 하고 잡혀가는 것’이라지만 그것은 아직 운동가들의 일일 뿐이다. 시민들에겐 투표장에서 제대로 찍어 선거혁명을 이루자는 말도 흘러간 레코드의 인기 없는 한 곡조쯤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요컨대 자신이 선거와 정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작지만 신명나는 일이 없다는 얘기다.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돌아가자. 그가 오늘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했던 것처럼 이 분노의 낙선운동을 ‘시민생활 속의 축제’로 승화시킬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 아닐까. 이 운동을 ‘후유증 없는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할 때다.
김창희<사회부차장>ins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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