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떠들썩하던 새 천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 천년이라고 해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엄청나게 법석을 떨었습니다. 물론 당신께서 모든 교육의 기초로 삼았던 수(數)는 사물을 세는 수단일 뿐 아니라 형상과 언어로 사고와 존재의 지평을 확대해 가는 기반인 만큼 새로 시작한 2000년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문명전환기의 새 인간형▼
하기는 이 새로운 미래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지 오래 됐습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개가인 정보통신의 발달과 매체환경의 변화로 지금까지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삶, 곧 디지털시대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이 격변의 시기는 선생께서 사셨던 산업혁명 시민혁명의 불길이 치솟던 근대의 여명기와 견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문명전환의 시대입니다. 당시는 옛 질서가 무너지면서 전통적인 공동체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인이 근대적 시민으로 홀로 서는 고통스런 때였고 동시에 자본주의 산업화의 거대한 동력이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를 해체하던 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 정보사회의 등장으로 그때 만들어진 ‘새 질서’가 거듭 ‘옛 질서’가 되고 해체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마다 멀티미디어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존재를 무한히 확장하는 동시에 그 익명성의 공간에 함-되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땀흘려 애써 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온 존재를 기울여 구원하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은 도덕과 종교를 대신하는 대중문화, 상품문화에 빠져 홀로그래프 쯤으로 명멸하는 때가 바로 지금 여기 제가 사는 2000년입니다.
하필이면 이토록 안팎이 어지러운 때 선생님처럼 교육이라는 천형(天刑)을 지고 사는 저같은 축들에게는 새 천년이 오히려 저주스럽기까지 합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활동이며 나아가서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는 고귀한 작업임을 선생님 가르침대로 믿기에 ‘지금 여기 이 땅의 교육’을 화두로 삼고 사는 저같은 사람은 새해가 두렵기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기말, 아니 천년의 끝 부분은 우리 교육사, 아니 세계 교육사에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시기로 기억될 만큼 비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인 일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실 붕괴의 참담한 현실▼
당신께서 앞장서서 새로운 희망의 등대로 세워놓은 근대교육, 현대적인 학교체제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교육입국’을 외치던 우리 교육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학교붕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근대교육의 상징인 국가주도의 공교육 체제와 학교는 와해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고단한 현실에 치어 반항하고 교사들은 현장의 열악함과 전망의 부재(不在)에 치어 절망합니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그토록 중요시했던 어머니의 역할을 담을 가정은 해체되고 이를 대신해야할 사회는 부도덕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와 가슴과 손발을 고루 발달시켜야 하는 전인교육은 아랑곳없고 입시위주로 단편적인 지식만 암기하는 전근대, 아니 원시적인 교육이 학교를 무너뜨리고 아이들을 병들게 합니다. 선생님 시대였다 해도 손가락질 받았을 이런 비교육적 관행이 시대착오적으로 잔존하고 병존하는 실정이니 학교붕괴도 당연한 귀결인지 모릅니다.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곧 위험한 기회입니다. 당신께서 일찍이 산업화의 도래와 공동체의 해체를 새로운 사회질서와 공동체를 만들 기회로 보고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자 했듯, 바로 지금 우리도 교육을 통해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사람다운 삶을 되살리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주변정황은 전혀 다릅니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지식의 중심이 아닙니다.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환경의 조성으로 지식은 언제 어디서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에 빠진 학교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그동안 지나치게 지식에만 매달려 지식전달의 장으로 축소됐던 역할에서 벗어나 제 몫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머리와 가슴과 손발을 고루 발달시키는 생활과 체험과 놀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자리로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학교는 인간의 ‘노작(勞作)’을 배우고 기르고 익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는 먹고 살기 위해 땀흘리고 애쓰는 일이 중심이라면 오늘날에는 풍요롭고 질 높은 삶을 살며 자신의 존재를 펼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파편화되고 개별화되어 사이버 공간과 같은 익명성의 바다에 빠져 단절된 채 자폐적으로 되어가는 새 세대에게 사람의 냄새를,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체험 놀이통한 인성계발▼
부도덕한 사회를 만든 어른들이나 교사들도 이들에게 ‘바담 풍(風)’하며 가르치려고만 들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진정한 도덕성을 되찾아 이들이 숨쉬는 ‘공기’가 더이상 불신과 죄악으로 부패하지 않은 ‘사랑의 공기’가 되도록 애써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결국 이제 인간의 구원은 그 고귀한 영혼을 있는 그대로 찾고 기르면서 자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날 눈부신 문명의 발달은 그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면서, 바로 그 사람이 걸림돌입니다. 선생님, 당신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신 교육자의 삶, 그 삶을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여기 거듭 나지 않고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생께서 처음엔 프랑스혁명에 열광하고 시민사회의 도래를 축복했다가 그 서슬퍼런 폭력과 독재의 후유증에 넌더리치며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고양시키는 도덕성 교육에 다시 기대를 걸었던 시행착오를 이 새로운 시대에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 주십시오.
2000년 새해 벽두에 한반도의 한 교육자 올림
정유성<서강대·교육학>
▼키워드:전인교육▼
하인리히 페스탈로치(1746-1827)의 교육이론은 우선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에 대중 또는 민중의 대두라는 교육의 새로운 과제에 마주쳐서 이들에게 경제적 자립능력뿐 아니라 인격도야를 통해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갖추게 하려는 근대 교육사상의 출발점이었다.
계몽주의 전통에 섰던 그는 인간의 본성을 동물적 상태, 사회적 상태, 종교 및 도덕적 상태의 복합물 등으로 보았다. 그는 이어 인간성이 자연의 산물, 사회의 산물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산물임을 지적하며 이 세 축의 조화를 통한 인격완성을 주장했다. 아울러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머리(지능력)뿐 아니라 가슴(심정력), 손발(기능력)을 고루 발달시키는 전인교육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생활교육이 교육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이 도야한다(Das Leben bildet)”라는 유명한 명제 아래 직업능력 개발뿐 아니라 인격도야를 위한 다양한 ‘노작(勞作·Arbeit)’의 교육적 중요성을 교육사상과 실천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는 교육이념뿐 아니라 교육방법에 있어서도 오랜 실천을 통해 다양한 이론들을 내놓아 특히 초등교육방법론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내면적 직관을 중시하고 요소화, 계열화, 통합화 등으로 현대적인 교육방법의 체계를 제시한 것이 그 한 예다.
▼사상의 전개▼
페스탈로치는 기원전의 플라톤, 그리고 지난 1000년의 루소, 듀이 등과 함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졌으면서 또 근대교육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교육 사상가요 실천가다.
특히 산업화와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온 그의 전인교육 사상은 삶의 바탕틀 자체가 변화하는 격변기에 인간성을 원래의 본성에 맞게 도야하려는 교육론으로서 근대, 현대의 교육이론과 교육논의를 선도했다.
하지만 초기에 보여주었던 사회개혁의 노력은 후기로 가면서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에 압도돼 개인의 덕행 수양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페스탈로치에서 비롯된 근대의 전인교육 이론은 헤겔의 교육철학에서 ‘인간의 실천에 내재하는 인간이성은 그 자체의 변증법에 따라 스스로 드러나고 실행된다’는 논의로, 그리고 마르크스의 종합기술 교육이론에서 ‘한사람 한사람의 계발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논의로 전개됐다.
산업화가 진전되고 개별화 기능화된 제도교육이 지배하면서 사라졌던 전인교육 이론은 이제 산업사회의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성 회복을 위한 ‘대안교육’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면서 지난 세기 말에 인성교육 이론이나 공동체 교육이론, 생태주의 교육이론에서 거듭 교육논의의 중심 화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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