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대통령선거때 이회창(李會昌)캠프에 몸담았던 이헌재씨가 대선후 DJ를 만난 건 당시 자민련소속의 김용환(金龍煥)씨를 통해서였다. 그런 사람이 새 정권 출범과 함께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발탁되고 이번엔 부총리 승격이 예고된 재경부장관에 올랐다. ‘남다른 능력’을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는 경쟁자급 관료들보다 금융 실물의 각론과 필드(시장)실전에 확실히 강하다.
▼종금사태 왜 뭉갰나▼
그럼에도 2J노믹스의 전개를 편하게 환영할 수가 없다. 이장관은 재정증가 억제와 ‘따뜻한 시장경제’를 위한 재정역할 강화를 동시에 얘기한다. 또 ‘노동의 유연성 제고’ 등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설명하다가 별로 생산적일 것 같지 않은 ‘생산적 복지’로 금세 돌아선다. 재정재건 의지가 분명치 않다.
재경부장관에 임명된 13일, 인위적 환율조정 없이 ‘강한 원화’정책을 펴겠다고 한 그의 언급은 적어도 국내적 관점에선 실언이다. 그 발언은 외국투기자본의 국내시장교란을 부채질했다. 정부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이장관이 원화 평가절상을 바라는 IMF와 미국을 의식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결국 시장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후퇴해 정부 경제팀장 입의 무게만 가볍게 했다.
자금난으로 지급불능상태에 빠진 나라종금이 21일 금감위에 의해 영업정지처분을 받았다. 사실은 이장관이 금감위원장으로 있을 때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는 금감위원장 당시에 나라종금문제를 알고도 시간을 끌어온 흔적이 있다. “총선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티라는 감독당국의 종용이 있었다”는 나라종금측 증언도 나왔다. 정치권 작용설도 있다. 이장관은 나라종금사태에 대한 책임은 면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를 보고 열을 추측한다.
이장관은 관치(官治)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요즈음 그가 재계를 향해 쏟아내는 발언들은 관치발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장관은 지난주 기업인들 앞에서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과거의 정부주도형 경제운영시스템이 누적시킨 비효율성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인들에게 ‘하라 말라’를 연발했다. 금융기관에 대해 문서는 남기지 않으면서 구두로만 지시하는 그의 구치(口治)는 더욱 대단하다.
전경련은 연초 ‘코스닥시장 급성장의 허와 실’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코스닥시장 급성장의 긍정적 효과와 문제점이 대비되고 정책당국의 제도적 보완 필요성이 제기됐다. 정부나 시장참여자들이 각기 다른 입장을 접어두고 씹어볼 만한 내용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장관은 이를 ‘대표적 기득권 방어논리’로 단정하면서 “경제 패러다임의 도도한 변화흐름을 읽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매도했다.
▼'新曲'이 듣고 싶다▼
이론(異論) 이설(異說)을 용인하고 ‘딴 소리’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도 능력이다. 이장관은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나는 경제의 기초여건이 좋은데 무슨 위기냐고 일축했던 97년의 경제팀장과는 수준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독선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지난날의 경험칙(經驗則)이다.
많은 국민도 세계적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숨가쁘게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이장관이 할 일이 있다. 각 경제주체들이 도도한 변화흐름에 ‘덜 위험하고 더 유효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뉴 이코노미, 뉴 비즈니스’의 비전과 전략을 보여주는 일이다. 바로 그런 창조적 유도를 통해 한국경제 구형모델의 핵심인 재벌까지도 스스로 이노베이션(혁신)에 나서도록 견인하는 일이다. “이장관에겐 10대때부터 혁명가적 기질이 엿보였다”고 어느 지인은 말했다. 하지만 낡은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과 질타, 대안없는 파괴만이 혁명의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재벌기업과 벤처기업의 윈윈(win-win)을 위한 이헌재 구상 같은 건 불가능할까. 되풀이되는 옛노래보다 ‘이헌재 신곡(新曲)’이 듣고 싶다.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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